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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지구 한 귀퉁이에서 덤덤하고 조용하게 사는 즐거움

(필사의 말들) 이옥선 『즐거운 어른』

by 하늘

“너 절대 유명해지면 안 된다. 유명해지면 인생이 피곤해.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길 가다가 넘어질 때도 있는데, 너 길에서 나자빠졌을 때 아무도 너를 모르면 그냥 툴툴 털고 일어나 갈 길 가면 되지만,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너를 알아보면 얼마나 쪽팔리겠니.”(p.107)


“아무도 나를 모르는데 책은 계속 냈으면 좋겠다.”가 이제 막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은 초보 작가의 인생 모토라면? 물론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러한 삶을 꿈꾼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연유에는 한때 큰 반향을 일으켰던 손석희 아나운서와 가수 이효리의 대화가 있다.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히긴 싫다. 어떤 뜻인지는 알겠는데 가능하지 않은 얘기 아닌가요?” “가능한 것만 꿈꾸는 건 아니잖아요. 저에 대한 욕심은 한도 끝도 없이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게 제 욕심인 거 같아요.” 가능하지 않은 것도 꿈꿀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 가당치도 않은 꿈을 꾸기로 했다.


브런치를 통해 출간 제의가 온 후, 편집자와의 미팅 전 가장 큰 고민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실명을 쓸 것이냐, 아니면 필명을 쓸 것이냐였다. 몇 주간의 고심 끝에 편집자님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기가 차게도 이렇게 말했다. “글 쓰는 저와 생활인인 저를 분리해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책을 낸다면 필명으로 활동하고 싶고요. 필명이어도 출간이 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겨우 118개의 글을 브런치에 올린 작가 지망생 주제에, 생짜 신인에게 책을 내주겠다고 먼저 연락한 귀인인 편집자님께 필명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감사하게도 필명이 받아들여져 무사히 책이 나오고 원하던 필명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필명을 고집했을까? 글 쓰는 자아와 생활하는 자아를 분리하고 싶다는 그럴싸한 대외적인 명분도 일정 부분 이유가 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솔직히 아는 사람 세 명만 건너면 다 아는 소도시에 사는 사람으로서 실명으로 책을 낸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아무개가 책을 썼다는데 말이야. 블라블라.” 그 블라블라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책 한 권 냈다고 ‘작가’라고 불리는 것도 쑥스러움을 넘어 민망했다. 세상에 나온 책 한 권으로 그게 내 인생의 모든 것인 양 내 생각의 전부인 양 평가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물어 올 “다음 책은 언제 나오나?”라는 주변의 압박 아닌 압박에서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니까 필명은 이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조차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는다. “일상적으로 주위에 존재하는 현실의 사람들은 꽤 성가십니다. 내가 책을 새로 낼 때마다 사람들은 마음에 든다, 마음에 안 든다, 라고들 말합니다. 분명하게 의견이나 독후감을 밝히지 않더라도 그런 건 얼굴을 보면 대개 알 수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그런 개별적인 반응을 직접 지켜본다는 것은 글을 쓴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힘겨운 일입니다. ” 대작가인 그가 이러할진대 이제 막 첫 책을 낸 내가 과연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분명 일희일비하는 건 물론이고 부정적인 피드백이라도 들은 날이면 마음 한편에 ‘꽁’하고 담아두었다가 수시로 꺼내 곱씹고 곱씹을 위인이다. 부정적인 말을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그릇이 아직 못 된다. 마음이 종지만 하다.

그리고 가장 두려웠던 건, 나를 아는 사람 모두가 아니 건너 건너 아는 사람까지(확대도 참 잘한다)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글쓰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의식하면서 글을 쓰게 될 내가 걱정되었다. 책에 실린 글들이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한없이 자유롭게 쓴 글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 더 민감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밀어 넣기만 하는 읽기를 10년 넘게 하다 보니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날이 찾아왔다. 이런 충동에 강하게 이끌려 책상에 앉아 무턱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제약도 없었고, 아니 어떻게 써야 한다는 걸 모르니 오히려 자유로웠다. 쓰고 싶은 걸 쓰면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글을 쓰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말 마음껏 썼다. 누가 쓰라고 한 것도 아닌데 쓰고 싶어 죽겠어서 쓰는 글. 세상 누구도 내 글에 기대하는 바가 없기에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글. 어느 날은 내가 쓴 글을 읽고 혼자 킥킥대기도 했고, 위로받기도 했다. 브런치 구독자의 라이크수가 적어도 글을 쓰면서 즐거우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사실 라이크를 누른 구독자가 단 열명이어도 그 사람들을 현실의 공간인 내가 글 쓰는 서재로 초대한다면 무려 열명이나 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셈이다. ) 나 자신이 어디에도 매여있지 않다는 자유로운 감각이 글을 쓰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글은 투박하고 서툴렀지만, 쓸 때마다 즐거웠고 그 즐거움의 원천은 나 자신이 자유롭다는 감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명이어야 했다.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친한 측근 몇 명 빼고는 책을 냈다고 알리는 것도 자제했다. 측근 다섯 명에게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만난 지 15년이 넘은 모임 멤버들에게는 (공연이나 전시를 보는 게 주목적이라 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 책이 나오게 된 데에 직접, 간접적으로 그녀들의 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작가의 책을 한 권씩 선물하면서 책 하나를 필명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책은 너무 사적인 이야기라 알려 줄 수 없다고.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오랜 기간 읽고 토론하던 나를 봐 왔기에 이해해 주었다.


매달 만날 사람들이기도 하고 매번 숨길 수도 없어 오픈한 최초이자 마지막 주변인들이다. 그중 한 언니가 가끔 “류 작가, 다음 책은 언제 나오나?”라고 물어와 식겁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뭐’ 하며 웃어넘긴다. ‘언니가 한 번 써 보세요. 그렇게 글이 숭덩숭덩 써지냐고요.’라는 말을 목구멍에 삼킨 채. 진지하게 대응했다간 지쳐 내 몸이 남아내지 않을 테니 모른 척한다. 고민 끝에 야심 차게 오픈했지만 멤버들도 그날뿐 내가 뭘 하고 사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내게 관심 가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음에 안도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더 오픈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찌 되었든 최소한의 지인들만 내가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걸 안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걸 안다. 이렇듯 필명을 쓰고 주변에 글을 쓰고 있다고 되도록이면 오픈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어떤 조건에서 글이 제일 잘 써지는가?’라는 데 있다. 첫 책을 통해 나라는 사람은 나 자신이 자유롭다는 감각이 있어야만 글을 잘 쓰는, 아니 글 쓰는 즐거움이 큰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글을 쓰면서 그렇게 즐거웠기에 글에 묻어 있는 즐거움을 보고 편집자님이 연락하신 게 아닐까? 그렇다면 즐겁게 쓴 내 글을 즐겁게 읽어 줄 독자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데 책은 계속 냈으면 좋겠다.”라는 가능하지 않은 꿈을 꾸게 되었다. 벌써 아는 사람이 내 기준으로 꽤 되니 아무도까지는 아니다. 내가 옳아서가 아니라 내게 맞는 방식이기에 이런 시스템 내지는 환경을 조성해 놓고 내가 즐기기 위한 글을 쓰고 있다.


지구 한 귀퉁이에서 덤덤하고 조용하게 사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혼자 씩 웃으며 자기가 쓴 글에 자뻑하는 즐거움을 지속하고 싶다. 이런 즐거움이 다음 책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즐겁게 썼으니 그것으로 족하. 이렇게 지구 한 귀퉁이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이렇게 끝나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럴리가. 밖은 밖이고 안에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외부 환경을 이렇게 세팅했음에도 첫 책 출간 후, 내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 때문에 글쓰기의 즐거움이 줄어들고 있다. ‘두 번째 책은 좀 더 나아져야지’라는 생각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글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책을 낸 작가라는 사람의 글이 왜 이 모양인가?’ 자책하기도 한다. 초심으로 돌아갈지어다. 어떤 것에도 매여 있지 않아 자유로웠던 날들. 글쓰기 자체에 즐거움을 느꼈던 날들. 다시 한 번 가볍게 훨훨 자유롭다는 감각으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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