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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잃어버린 고요함을 찾아서

(필사의 말들) 알랭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by 하늘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셈하는 건 쉽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고요함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차리기는 어렵다.”(p.197)

잃어버린 고요함을 찾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세상의 소란에서 비켜서고 싶었던 걸까? 2-3년간 휴가를 서울에서 보냈다. 1박 2일이든 2박 3일이든 전시 2-3개를 보면서 그림과 그림 사이를 걸었다. 아니 한 인간이 시간을 통과하면서 변해가는 과정 사이사이를 걸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혼자 전시도 보고 밥도 먹고 서울의 낯선 거리를 걷다 돌아오면 환기가 되었다. 읽고 쓰는 책상 앞 좁디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잠시 나를 세상 한가운데 놓아두었다 돌아오면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이 생겼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다 보면 일상에서 탈주해 뛰쳐나가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럴 땐 셀프 휴가의 형태로 일주일을 쉰다. 상반기 하반기 두 번 정도인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곳에도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가만히 있고 만 싶었다. 휴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은 딱 하나였다. ‘왜 조용한 휴가를 원하는 걸까?’


원흉은 바로 어느 순간 과해져 버린 유튜브 영상 필사 때문이었다. 글은 쓰고 싶어 미치겠는데 어디에서도 글 쓰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써야 할지 백지상태였을 때 유튜브는 구세주였다. 수많은 작가들의 영상을 찾아 들으며 글쓰기 선생님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고전 평론가 고미숙 님과 작가 은유 님이다. 고미숙 님은 글을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은유 님은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었기에 반복해서 들으며 서툰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듣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그녀들의 강의를 필사한 게 유튜브 영상 필사의 시작이었다. ‘세상 참 좋아졌네. 이렇게 훌륭한 작가님들 강의를 집에서 편안하게 집에서 들을 수 있다니!’


유튜브를 통해 글쓰기 강의만 들은 건 아니다. 책 한 권을 읽으면 작가의 영상이나 리뷰 영상을 찾아보는데, 이러한 영상 중 하나를 골라 필사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글을 쓴 작가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책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내가 읽은 책을 더 풍성하게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추가된 방법이다. 영상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냥 흘려들으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기 때문에 필사해 기록으로 남겨두면 다른 글을 쓸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이유도 있다. 이렇게 시작된 영상 필사 노트가 한 권 두 권 쌓여가고 있다. 읽고 토론한 책 필사에 이은 유튜브 동영상 필사는 그렇게 읽고 쓰는 자의 루틴이 되었다. 그렇게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이 정도까지면 딱 좋으련만! 친절한 유튜브 알고리즘이 문제다. 어느 날 취향 저격의 유튜브 채널인 <최성운의 사고실험>을 알게 되면서 일상의 리듬이 깨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이런 채널이 있지?’ 누군가를 초대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반적인 방식임에도 본질적인 것에 무게중심을 두는 인터뷰어의 질문과 인터뷰이의 깊은 대화는 ‘나도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건드리며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채널을 왜 좋아해요?” 누군가 물어온다면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 같다. 현상만 넘쳐나고 이미지로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본질에 대한 이야기라니! ‘본질’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혹하고 또 혹했다. 이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 사고의 깊이가 점점 더 수면 아래로 깊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 채널을 애정하다 보니 필사는 당연한 수순. 이 채널에 나온 영화평론가 이동진, 번역가 황석희, 작가 요조, 가수 10센티, 런던 베이글 뮤지엄 창업자 ‘료’의 영상을 차례로 필사하기 시작했다. 홀린 자의 필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내 생각의 자양분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이 노트를 빠르게 채워 나갔다. 이런 일에는 가속도가 붙는 법, 노트 한 권을 채우는데 채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빼곡한 글씨로 채워진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한 사람당 적게는 5장에서 많게는 20장 가까이 되는 필사한 글의 양을 보고 나도 심히 놀랐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평소보다 과하고 빠른 속도의 영상 필사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보통은 영상 하나를 필사한 후,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가지는 편인데, 이번에는 영상과 영상 사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영상 필사라는 행위에 중독되었는지 머릿속에 계속 밀어 넣기만 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멈추지 못했다. 필사해 놓은 글들이 소화되지 않은 채 계속 쌓이고 있어도 다음날 오른손은 어김없이 또 다른 영상을 받아 적고 있었다.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영상인 것처럼, 이 영상을 필사하지 않으면 뭔가 큰일 날 것처럼. 유튜브 영상 필사에 중독된 신체가 되고 말았다.

“현대 세계는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늘 알려 준다. 꼭 읽어야 할 책과 반드시 봐야 할 영화가 있다. 절대 지나쳐서는 안 되는 기회가 있다. 이 모든 것이 특권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은 강압이 될 수 있다.”(p.192) 반드시 봐야 할 영상이라 생각해 필사해야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절대 지나쳐서는 안 되는 기회라 생각해 허겁지겁 필사했나 보다. 내 집 책상 위에서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게 강압으로 작용해 스스로에게 필사를 강제했는지도 모르겠다.

유튜브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인 디지털 세상의 한 단면이다. 디지털은 정보의 바다이기에 핸드폰만 열면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고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연결되길 원하지 않아도 항상 연결된 상태다. 아침에 핸드폰을 열면 바로 조금 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들에 대한 최신 뉴스들이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단 채 맹공격을 하기 시작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보고 싶지 않아도 어느 순간 보고 있고, 읽고 싶지 않아도 어느 순간 읽고 있다. 뚜렷한 해법도 없는 온갖 걱정들이, 몰라도 내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들이 아침부터 내 영혼에 쏟아부어진다. 핸드폰을 통해 전송되는 광고 메시지들은 또 어떤가? “신상품이 나왔어요. 세일입니다. 당장 사세요. 지금이 기회예요.” 라며 하루 종일 알람을 보내오는데 이 또한 단칼에 무시하지 않으면 어느새 이걸 다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단체 카톡방에 어김없이 뜨는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좋은 구절 퍼레이드까지. 그냥 넘겨야지 하다가도 원하지 않는 정보에 스멀스멀 짜증이 밀려온다. 얼마 전 초대된 단체 카톡방에는 한 회원이 신문 4-5개를 요약해 오늘의 뉴스를 매일 올리는데 이 또한 원하지 않는 정보이기에 달갑지 않다.


굳이 안 봐도 되는 글들이 수시로 메시지를 보내오며 보라고, 봐야 한다고 교묘하게 강제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인지 상태에 늘 노출되어 있다. 세상의 소란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내가 처한 상황은 디지털 시대의 산물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다. 굳이 안 봐도 되는 글들의 홍수 속에서 쓸데없는 글들을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보게 되고 읽어지는 속수무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방법이라면 가급적 핸드폰을 멀리하는 수밖에는 없는데 스스로 유튜브 영상 필사 기계가 되어 정보 과다를 자초했으니!

굳이 안 봐도 되는 동영상을 보는 습관도 한몫 거들었다. 영상 필사 중독도 문제지만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에도 이미 중독되어 있는 것 같다. 읽고 쓰는 일과가 끝나면 습관적으로 핸드폰부터 찾는다. 영상 필사 후에는 영상을 보고 필사했으니 영상은 보지 말아야 하는데 휴식시간이라는 핑계로 도파민이 될 만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 헤맨다. 일했으니 보상을 줘야지. 주로 ‘나 혼자 산다’ 같은 예능 프로그램들이다.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클릭하기도 한다. 영상 시청에 이은 또 다른 영상 시청. 전에는 그래도 읽고 쓰는 시간과 유튜브 영상 시청과의 거리가 이렇게 가깝지 않았다. 그런데 한 달 이상 동영상 필사 후 다시 휴식용 동영상을 보느라 너무 많은 시간 유튜브 영상에 갇혀 있었다. 사이사이 시간적 여백을 두지 않은 채 동영상과 동영상을 맴돌았다. 이것들로 인한 과도한 자극 때문에 나의 정신과 육체가 쇠약해져가고 있는지는 까맣게 모르는 채. 뉴스, 문자, 카톡으로 끊임없이 전해지는 세상의 소란스러움도 버거운데 아무리 내게 도움이 되는 필사라도 평균보다 과한 동영상 시청을 하며 미친 듯이 달렸으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조용해지고 싶은 욕망이 들끊었으리라.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들었다.

절대 지나쳐서는 안 되는 기회라 생각해 영상 필사를 멈추지 못했다. 내겐 분명 자체 리듬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세상의 소란스러움에 파묻혀 리듬을 잃어버렸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지만 과하고 과했다. 급기야 핸드폰 속 유튜브 영상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소음으로 느껴졌다. 가끔 듣는 클래식 음악조차 소음으로 들렸다.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일상의 밸런스가 '와장창' 깨졌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잠깐 방심한 사이 정말 그렇게 되었다.

조용한 일상을 보내다 번잡한 서울로 휴가를 떠났던 내가 집에 있었음에도 스스로 자초한 소란스러움에 지쳐 조용한 휴가를 선택했다. 조용하고 고요한 시간을 통과해야만 일상의 균형을 다시 찾을 듯했다. 어느 곳에도 가지 않았다. 어딘가로 떠날 에너지도 기력도 없었다. 어떠한 소리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는 산책을 나갔다. 핸드폰 없이 집을 나섰는데 이것만으로도 세상의 소란에서 좀 멀어진 것 같아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뭔가에 끌려가는 느낌이 아니라 다시 삶의 주도권을 잡은 듯한 느낌? 아파트 주변을 걸으며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인 것처럼 나무와 풀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없이 느리게 한 걸음 한걸음 걸었다. 영상에 중독된 신체가 원래의 나로 돌아오길 바라면서 저녁이면 잃어버린 고요함을 찾아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영상 속 인위적인 소리들이 아닌 자연에서 나는 그대로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매미 울음, 새의 지저귐, ‘투득투득’ 빗소리에 귀를 내어주었다. 마치 먼지 묻은 귀를 자연의 소리로 씻어내고 싶다는 듯.

“시끌벅적한 지인으로 가득 찬 방에 들어가 어색한 사람들과 몇 시간 동안 잡담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민감한 정신에 얼마나 큰 충격을 가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이는 한 달 정도 저녁을 조용히 보내야만 치유되는 경험이다.”(p.197) 일주일로는 해결이 되지 않겠네.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나 지금은 고요해질 시간. 잃어버린 고요함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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