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이다. -데모크리토스
저는 지금 자주 가는 동네 식당에 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입니다. 지난겨울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눈 동네 이웃과 저녁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따뜻한 주황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파란색 여름옷을 입었습니다.
저처럼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두 분은 저를 발견하곤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여기가 단골 식당이라면서 주인아주머니를 찾습니다.
놀란 표정의 가게 주인이 무슨 사이냐고 묻습니다.
노신사는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응, 우리 친구야.
서로의 나이를 잊은 친구라니... 이런 동화 같은 일이 또 있었던가. 저는 그때를 떠올립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어느 겨울, 얼어붙은 공기 속 맑게 개인 도시의 풍경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산에 올랐습니다.
신년을 맞아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싶어 평소보다 더 높이 올랐는데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숲에 가려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어지는 계단 끝까지 오르면 만날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습니다.
그날 오픈 시간을 착각해 1시간 일찍 도착했습니다.
1시간, 우선 숨을 돌리기로 하고 너른 바위에 걸터앉았습니다.
추운 날씨 탓에 더 깊은 산 쪽으로 등산객 두어 명이 지나갈 뿐 내내 저 혼자였습니다.
가깝고 먼 새소리를 들으며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연신 올려다보았습니다.
속눈썹 끝에 얼음방울이 맺히고 귀 끝이 아려올 즈음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눈만 내어놓고 목도리로 꽁꽁 싸매고 걸어오는 행인과 눈이 마주쳐 저는 옅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제게 다가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어갈래요?”
그분은 도서관 관리인이셨고 아직 오픈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도서관 안은 큰 창을 통해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로 가득했고 포근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예전에 왔을 땐 보지 못했지만 책장 뒤켠에 간소한 탕비실이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작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손수 만들어오신 약밥과 차를 나누어 마셨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동네 이웃이었습니다. 원래 다른 시설을 관리하는데 이곳에서 일하던 분이 사정이 생겨 잠시 대타로 일하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산 중턱이라 올라오기 힘들고 게다가 추운 겨울이어서 이곳을 맡고 싶지 않았지만 주민센터에서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저의 이웃은 나이 든 강아지와 함께 살면서 주말에는 교회에 가고 평일에는 청소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이 나이에 일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고마워하셨습니다.
자기 연배의 사람들이 이 일을 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도 들려주셨습니다.
기간제 청소관리직 경쟁률이 워낙 치열해서 체력 시험을 보는데, 예전에는 달리기 경주로 뽑다가 최근에는 쌀 포대를 들고 운동장을 뛸 수 있는지로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탈락한 사람들은 무척 속상해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저희 어머니와 동갑이셨고 따님과 저는 동년배였습니다.
그렇게 가족 이야기를 하다 저를 쳐다보곤 잔잔히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별 얘기를 다하네.”
우리는 헤어지면서 다음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꼭 만나자, 그런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일하고 어디에 사는지 제가 알고 있으니 언제든 찾아오라는 느슨한 약속이었습니다.
저는 그 만남을 소중히 품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몇 주 뒤, 다시 찾은 도서관 탕비실엔 나이가 지긋하신 새로운 관리인이 계셨습니다. 집에서 구워온 쿠키와 편지가 잘 전해질 지 알 수 없었지만 그대로 두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뜨거운 여름, 전혀 다른 곳에서 재회했습니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다며 반가워하셨고 연락처를 주고받았습니다.
제게 받은 신년 카드를 냉장고에 붙여 두고 매일 저를 위해 기도한다고 밀씀하셨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글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매일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친구라니.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게 또 시간은 흐르고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안녕하세요./날마다. 생각하고/있답니다."
한 줄 한 줄 띄어 쓴 글. 엄마 같은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세 번째 만남은 겨울이 시작할 즈음, 친구의 부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같이 살던 강아지의 장례식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냉장고엔 신년 카드와 아침점심저녁이라고 쓰인 약봉지가 나란히 붙어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연과 필연이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주말 저녁,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로 식당엔 활기가 가득합니다.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가운데 우리 셋은 잔을 부딪히며 만남을 기뻐했습니다.
잔잔한 꽃무늬 셔츠를 곱게 입은 저의 새 친구는 나이가 들면 만나고 싶어도 상대방이 먼저 만나자고 할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식도 그러한데 젊은 친구가 불편해하면 어떡하지, 고민하느라 초대가 늦었다고. 밤이 무르익고 점잖고 사려 깊은 친구들과 집 앞까지 걸어와 헤어졌습니다. 약속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1965년 노벨상을 수상한 분자 생물학자인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화란 대를 이어 유전자가 복제되는 ‘필연’ 가운데 항상성을 깨는 ‘우연’으로 인해 그 방향성을 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끼어든 우연은 이제 필연이 되어 어김없이, 복제됩니다.
우연과 필연.
과학책 제목이라기엔 소설의 한 구절 같은데요, 이렇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우연으로 만난 사람들이 어느새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리는 모습을요.
그 집 냉장고엔 아직도 제 카드가 붙어 있을까요?
오랜만에 안부를 묻고 싶어 집니다.
저의 새로운 친구를 오래된 친구에게 소개해주는 재밌는 상상도 해봅니다. 필연처럼 동갑이거든요.
저를 기다리고 있을 새롭고도 오래된 인연에 감사하고 설렙니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이다.
-데모크리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