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 수주보다 중요한 영수증처리, 그리고 관절통

ep.35_영웅들의 귀환과 재무팀의 빨간 펜

by 김멀똑


"지구 반대편에서 1,000억짜리 계약을 따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본사 재무팀 김 대리에게 멕시코 노점상의 타코 영수증을
비용으로 인정받는 일이다."



미국, 멕시코, 인도네시아를 돌며 도합 100억 원어치의 계약과 통관을 뚫어냈다. 비행기 마일리지와 함께 내 위장 점막도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래도 서울 본사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전쟁 영웅의 그것처럼 당당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귀국 후 3일째 되는 날 아침.


나와 링링, 마테오, 그리고 양 과장은 14층 재무팀 회의실에 죄인처럼 일렬로 앉아 있었다. 차가운 형광등 아래, 깐깐하기로 소문난 재무팀 김 대리가 두꺼운 뿔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우리의 법인카드 정산 내역서를 빨간 펜으로 툭툭치고 있었다.


"본부장님. 제가 아무리 글로벌 비즈니스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선을 좀 넘으셨는데요."


김 대리가 첫 번째 영수증을 모니터에 띄웠다.


"미국 뉴저지 결재 건입니다. '마케팅 판촉비 - 500달러'. 그런데 세부 내역서에 적힌 지급처가... '로블록스(Roblox)'요? 강 본부장님, 출장 가셔서 업무 시간에 10대들 게임하셨습니까?"


마테오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어머, 대리님! 그건 미국 젠알파 틱톡커들을 섭외하기 위해 제가..."


"마테오 대리님."


김 대리가 칼같이 말을 잘랐다.


"우리 회사 회계 기준표상 '미성년자를 위한 가상 게임 화폐 구매'는 마케팅 비용으로 털 수 있는 계정 코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본부장님 급여에서 차감 처리 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된장, 65억짜리 미국 매대 계약을 따낸 전술이, 고작 65만 원어치 계정 코드가 없어서 내 월급에서 까이게 생겼다. 마눌님에겐 뭐라고 말하지 ;


"좋아. 로블록스는 내 개인 카드로 긁은 셈 칠게. 다음 건 뭡니까."


나는 쓰린 속을 달래며 물었다.


김 대리가 한숨을 쉬며 꼬깃꼬깃해진 종이 쪼가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시뻘건 기름이 묻어있는, 멕시코시티 뒷골목 카를로스와의 타코 노점상 영수증이었다. 스페인어로 휘갈겨 쓴 글씨는 절반쯤 지워져 있었다.


"멕시코시티, 3만 5천 원. 본부장님, 이건 대체 뭡니까? 식대 영수증에 왜 지문이랑 정체 모를 고기 기름이 묻어있죠? 게다가 간이 영수증은 아시다시피 3만 원까지만 비용 처리가 됩니다. 5천 원 초과하셨네요."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


"김 대리. 내가 경영전략부터 브랜드 마케팅, 이커머스 채널 영업까지 21년을 이 바닥에서 굴렀어. 내가 저 기름 묻은 영수증 받으려고 타코 먹으면서 멕시코 파트너한테 50억짜리 연장 계약을 구두로 따왔다고. 근데 5천 원 한도 초과라고 이걸 반려해?"


김 대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50억을 벌어오신 건 영업팀의 훌륭한 성과입니다만, 5천 원을 초과한 간이 영수증을 처리하려면 곽 필립 상무님의 '친필 자술서'가 필요합니다. 상무님께 가서 '멕시코 타코 기름 묻은 영수증 초과 승인서'에 사인받아 오실 수 있으십니까?"


곽 상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방가르드한 미학'을 부르짖는 그 인간에게 타코 기름 묻은 3만 5천 원짜리 영수증 결재판을 들이밀 생각을 하니, 차라리 5천 원을 내 사비로 내는 게 수명이 길어지는 길이었다.


"하아... 그것도 내 월급에서 까."


마지막은 양 과장 차례였다.


"양 과장님. 자카르타에서 복사 및 제본비로 15만 원을 쓰셨네요? 규정상 해외 인쇄비는 일 5만 원 한도입니다. 대체 인도네시아 항구에서 무협지라도 찍어내셨습니까?"


양 과장이 퀭한 눈으로 조용히 양배추 위장약을 까서 입에 넣었다.


"세관의 억지 규제를 우회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관세법과 스위스 랩 분자식 논문 500페이지를 출력해서 세관원 얼굴에 던 지... 아니, 제출했습니다. 그 서류 덕분에 50억 치 화장품 소각을 막았죠."


"사유는 훌륭하나, 예외 한도 초과입니다. 이것도 상무님 자술서 대상입니다."


양 과장이 말없이 10만 원짜리 수표를 지갑에서 꺼내 김 대리 책상 위에 툭 올려놓았다.


"내 돈으로 낼 테니까 잔돈 거슬러 주십쇼."


그의 뒷모습에서 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재무팀의 빨간 펜 난도질을 당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1,000억 프로젝트의 위대한 첫걸음을 뗀 영웅들의 몰골이라기엔 너무나 처참했다.


나는 무릎을 짚고 앓는 소리를 냈다. 곧 쉰을 바라보는 나이. 이코노미석에 구겨져 3개국을 돌고 났더니 관절마다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아이고, 허리야... 이 짓거리 계속하려면 TP라도 받아야지, 이러다 제 명에 못 죽겠다."


마테오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고, 링링은 편의점에서 산 대용량 피로회복제를 링거처럼 마시고 있었다.


"본부장님."


마테오가 투덜거렸다.


"우리 방금 100억 넘게 회사에 벌어다 주고, 정산 털려서 한 사람당 10만 원씩 사비로 토해낸 거 알아요? 진짜 개빡치네~"


"그게 직장인이야. 밖에서는 100억을 쥐락펴락하는 장수처럼 굴어도, 본사 게이트 찍고 들어오면 3만 원짜리 영수증 한 장에 목숨 거는 쫄보들."


내가 헛웃음을 치며 지갑을 꺼냈다. 회사 법인카드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야, 됐고. 다들 수고했다. 법카 한도 초과니까, 오늘은 내 개인 카드로 쏜다. 저 앞 국밥집 가서 특으로 하나씩 시켜. 소주도 시키고."


뜨끈한 순댓국 국물이 위장을 타고 내려가자, 며칠간 쌓였던 글로벌 비즈니스의 독기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미국 바이어의 오만함도, 멕시코 마초의 텃세도, 인도네시아의 부패한 세관도 이 뚝배기 한 그릇 앞에서는 다 부질없는 안줏거리일 뿐이었다.


"크으... 살 것 같다."


양 과장이 깍두기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없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화려한 영웅 서사 뒤에 남겨진, 영수증 쪼가리와 관절통.


우리는 비루하고 초라했지만, 그래서 더 끈적하고 징글징글하게 살아남을 것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1,000억을 향한, 아니, 빌어먹을 3만 원짜리 간이 영수증을 위한 사투가 시작될 테니까.


젠장.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Q1. 위대한 성과는 왜 사소함 앞에서 부정당합니까?


수백억의 계약을 따낸 영웅도 3만 원짜리 영수증 규정 앞에서는 잠재적 횡령범으로 취급받습니다. 거대한 시스템(조직)은 개인의 비범함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 비범함이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가장 쪼잔한 규율로 인간을 길들입니다. 당신이 증명해 낸 '압도적 성과'가 조직의 '하찮은 규정'에 의해 모욕당할 때, 당신은 조직의 부품으로 순응합니까, 아니면 당신만의 존엄을 지켜낼 내면의 방패를 가지고 있습니까?



Q2. 인간의 야망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까?


1,000억을 향한 야망은 무한하지만, 그 야망을 담고 있는 그릇은 이코노미석과 숙취에 관절이 닳아가는 4050의 나약한 육체일 뿐입니다. 끝없는 성장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속도전 속에서, 당신은 서서히 낡아가고 마모되는 당신의 가장 솔직한 '물리적 한계(육체)'와 어떻게 화해하고 있습니까?



Q3. 무엇이 진짜 당신의 '허기'를 채웁니까?


거대한 계약서나 통장 잔고는 직장인의 닳아버린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차가운 형광등 아래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는 것은 결국 뜨거운 국밥 한 그릇과 실없는 농담이라는 원초적 연대입니다. 화려한 숫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텅 빈 공허함이 밀려올 때, 당신의 서늘해진 마음을 덥혀주는 가장 비루하고도 따뜻한 '아날로그적 온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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