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_50억 압류를 풀어낸, 합법적 사기극
"세상의 모든 무식한 규제를 박살 내는 가장 완벽한 무기는
정의로운 논리가 아니라, 상대가 읽다 지쳐 포기하게 만들,
더 두껍고 복잡한 '합법적 서류 뭉치'다."
멕시코시티 공항의 VIP 라운지.
싸구려 데킬라의 숙취가 관자놀이를 망치로 때리는 듯했다. 나는 차가운 생수를 연거푸 들이켜며, 카를로스에게 뜯어낸 '20% 성장 확약서'가 든 낡은 서류 가방을 끌어안고 소파에 파묻혀 있었다.
옆자리에서는 마테오가 실크 안대를 낀 채 곯아떨어져 있었고, 링링은 노트북을 켠 채 남미 대륙의 예상 마진율을 엑셀로 깎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도장 깨기가 끝났다. 서울로 돌아가면 곽 필립 상무의 아방가르드한 헛소리를 며칠 정도는 기분 좋게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징- 징-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한국 본사에 남아 아세안 지역의 물류를 통제하던 양 과장의 카톡이었다.
[양 과장: 본부장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세관에서 하반기 핵심 물량 통관 거부당했습니다.]
[양 과장: 할랄-비건 교차 인증서 원본 미제출 사유인데요, 이틀 뒤 전량 압류 및 소각 처리 통보받았습니다, 규모는 약 50억 정도 ㅜ]
잠이 확 깼다. 숙취가 단숨에 위산으로 변해 식도를 타고 역류했다.
"이런 썅... 할랄은 또 뭐야."
방금 전까지 멕시코에서 타코 기름을 묻혀가며 간신히 50억짜리 계약을 물어왔는데,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50억이 잿더미가 될 위기에 처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단 1초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쪽 대륙의 불을 끄면, 반대쪽 대륙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나는 옆에서 자고 있던 마테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마테오. 일어나. 서울행 티켓 취소해야겠다, 우린 적도로 간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탄중 프리옥(Tanjung Priok) 항구.
체감 온도 40도, 습도 95%. 매연과 바닷바람이 섞인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나는 안전모를 쓴 채 컨테이너 야적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시뻘건 철창 속에 우리 본부의 하반기 핵심 물량, 50억 원어치의 프리미엄 스킨케어 세트가 일주일째 묶여 있었다. 인도네시아 식약처(BPOM)와 세관이 갑자기 "특정 유화제 성분에 대한 '할랄-비건 교차 인증서' 원본을 당장 제출하라"며 통관을 막아버린 것이다.
사전 고지도 없는 미친 억지 규제. 본사 법무팀 변호사들은 "현지법 개정으로 인한 불가항력(Force Majeure)이니, 전량 폐기하고 보험 처리나 알아보자"며 손을 씻었다. 하루 창고 보관료만 500만 원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등줄기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국의 곽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무님. 현지 세관이 막무가내입니다. 로펌도 포기했고, 이대로면 50억 전량 소각해야 합니다."
화상 너머의 곽 상무는 파스텔 톤 리넨 셔츠를 입고 클래식을 듣고 있었다.
"오, K. 너무 숫자에 연연하지 마세요. 뜨거운 적도의 태양 아래서 최고급 화장품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이거 완전 전위적인 '소멸의 미학' 아닌가요? 예술적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편히 돌아오세요."
뚝.
이런 미친..
나는 휴대폰을 바다에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챙겨 온 위장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법도 안 통하고 상식도 안 통하는 부패한 관료주의의 벽. 21년 짬바의 영업력으로도 이 거대한 타국의 행정 폭력 앞에서는 그저 무력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에어컨을 최대로 틀었지만 열이 식지 않았다. 나는 넥타이를 집어던지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 다 끝났어. 내일 오전까지 서류 못 넣으면 압류 후 소각이래. 50억짜리 캠프파이어 구경이나 하고 서울 가자."
그때, 어젯밤 이곳으로 날아와 방구석 데스크에서 내내 타닥타닥 기계식 키보드만 두드리던 양 과장이 돌아앉았다. 최근 들어 부쩍 머리숱이 줄어든 것 같은 정수리, 핏발 선 눈, 그리고 책상 위에 종류별로 깔려 있는 양배추 위장약(카베진)들. 마테오가 화려한 '뷰티 마피아'라면, 양 과장은 본부의 그림자에서 숫자와 규정을 주무르는 '관료주의 해커'였다.
"본부장님. 화장품 50억 원어치, 안 태워도 될 것 같은데요...."
양 과장이 안경을 척 치켜올리며 모니터를 돌려 내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빼곡한 영문법 조항과 관세청의 품목 분류표(HS Code)가 띄워져 있었다.
"본사 로펌 변호사들은 '화장품(HS 3304)'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할랄 인증을 뚫으려니까 불가항력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벽이 막혔으면, 벽을 부술 게 아니라 문패를 바꿔 달아야죠."
"문패를 바꿔? 세관원들이 바보냐? 화장품을 화장품이라 하지 그럼 뭐라고 해?"
양 과장이 책상 위 위장약을 하나 까서 오독오독 씹으며 건조하게 말했다.
"우리 스킨케어 세트의 주성분 배합표를 스위스 SGS(글로벌 검사 기관) 포맷으로 재배치했습니다. 유효 성분은 뒤로 숨기고, 세정에 쓰이는 '계면활성제' 성분의 비중을 서류상 최상단으로 끌어올렸죠. 이러면 이 제품은 더 이상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3304)이 아닙니다. 화학적 세정제, 즉 '유기계면활성제품(HS 3401.30)'으로 합법적인 품목 분류(세탁)가 가능해집니다."
내 눈이 커졌다.
"잠깐. 세정제로 들어가면...?"
"네. 인도네시아 관세법 제4항 B조에 의거, 산업용 및 일반 세정제로 분류된 품목은 이번에 신설된 '할랄-비건 교차 인증' 면제 대상입니다. 완전한 프리패스죠."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근데... 현지 세관원 놈들이 그 꼼수를 인정해 주겠어? 걔네들 뒷돈 뜯어내려고 작정한 놈들인데."
"그래서 틈을 주면 안 됩니다. 뇌물 대신, 그놈들의 '퇴근 본능'을 찌르는 겁니다."
양 과장이 씩 웃으며 옆에 놓인 거대한 종이 뭉치를 툭 쳤다.
무려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였다.
"지난 12시간 동안, 인도네시아 세관 관보, 1998년 아세안 무역 협정문, 스위스 랩(Lab)의 성분 분석표, 그리고 의미 없는 화학 분자식 논문 300장을 교차 인용하여 만든 '품목 분류 변경 요청서'입니다. 100% 합법적인 팩트만 모아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지루한 쓰레기 서류죠."
양 과장이 500페이지 뭉치를 챙겨 들며 일어섰다.
"자카르타 공무원들은 덥고 게으릅니다. 뒷돈 500달러를 뜯어내려다, 영문 화학 기호가 빽빽하게 적힌 이 500페이지짜리 서류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느라 밤을 새울 인간은 이 나라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가시죠, 본부장님. 통관 도장받으러."
오호,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양 과장, 너 원래 이렇게 치밀했냐?..."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입사 전에 고시 준비했었는데.. "
다음 날 오전. 탄중 프리옥 세관 심사국.
완장과 제복을 찬 뚱뚱한 세관 간부가 거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섞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미스터 K. 인증서 원본 가져왔어? 없으면 오늘 오후에 압류 스티커 붙인다."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양 과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어젯밤 제본한 500페이지짜리 둔기를 세관원의 책상 위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책상 위의 찻잔이 덜컹거렸다.
"This is the re-classification document. (품목 재분류 서류입니다.)"
양 과장은 속사포처럼 기계적인 영어를 쏟아냈다.
"Based on the ASEAN Free Trade Area Article 4, section 2... (아세안 자유 무역 협정 제4조 2항에 의거하여, 첨부된 SGS 랩 리포트의 계면활성제 분자 구조식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세관 간부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그는 양 과장이 들이민 서류를 펼쳤다. 첫 페이지부터 끝을 알 수 없는 미친 분량의 폰트 사이즈 8짜리 영문 화학식과 국제법 조항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가 서류를 대충 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이게 다 뭐야? 나는 화장품 할랄 인증서를 달라고 했는데!"
"Page 342, paragraph 4. (342페이지, 4번째 단락을 보십시오.)"
양 과장이 자비 없이 서류를 팍 넘겨짚었다.
"It is legally classified as a surfactant. Halal exempt. (이것은 법적으로 계면활성제로 분류됩니다. 할랄 면제입니다.) 반려하시겠다면, 이 500페이지의 논문을 반박할 귀국의 공식 문서를 서면으로 제출해 주십시오. 즉시 국제 상사 중재원에 회부하겠습니다."
세관 간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의 뇌 회전이 멈추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뒷돈을 뜯어내려다, 이 지독하게 두껍고 합법적인 서류의 늪에 빠져 한 달 내내 야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동공을 지배했다.
세관 간부는 나와 양 과장의 무표정한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신경질적으로 서랍에서 도장을 꺼냈다.
쾅!
[APPROVED (승인)]
단 10분.
국제 로펌 변호사들도 두 손 들었던 50억짜리 관료주의의 성벽이, 이과생 해커가 밤새워 조립한 '합법적 서류 폭탄'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세관 건물을 빠져나오자, 숨 막히는 적도의 열기가 다시 훅 끼쳐왔다.
하지만 내 속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뻥 뚫려 있었다. 멀리 야적장에서 우리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컨테이너들이 줄지어 트럭에 상차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양 과장의 굽은 등을 팡팡 내리쳤다.
"야, 양 과장. 너 진짜 미친놈이다. 그 500장짜리 쓰레기 서류를 진짜 다 읽을까 봐 쫄리지 않았냐?"
양 과장이 주머니에서 위장약을 꺼내 씹으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압도적인 텍스트 앞에서는 방어 기제가 작동합니다. '내가 무식해서 못 읽는 게 아니라, 중요하지 않아서 안 읽는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도장을 찍어버리죠. 관료주의를 이기는 건 혁명이 아닙니다. 그놈들보다 딱 두 배만 더 복잡하고 지루해지면 됩니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미국에서 10대들의 틱톡으로 65억을 벌어온 마테오와 링링.
방콕 사모님의 코 수술로 물류를 뚫어낸 최 부장.
그리고 500장짜리 종이 쪼가리로 50억짜리 인도네시아 세관을 박살 낸 양 과장.
어쩐지 이들과 함께라면 뭔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0억으로 가는 길. 아세안의 거대한 빗장이 가장 지루하고 완벽한 방식으로 열려버렸다.
Q1. 당신은 '벽'과 싸웁니까, 규정의 '틈새(Hack)'를 찌릅니까?
현지의 억지 규제 앞에서 본사 로펌은 '불가항력'이라며 포기했지만, 양 과장은 벽을 부수는 대신 품목 분류(HS Code)라는 규칙의 틈새를 찾아내 합법적으로 우회했습니다. 조직의 딱딱한 규정이나 예산 부족이라는 '벽'에 부딪혔을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Q2. 상대의 '나태함(본성)'을 무기로 써본 적이 있습니까?
부패한 세관원을 굴복시킨 것은 뇌물도, 정의도 아니었습니다. "이 500장짜리 영문 화학식을 읽느니 차라리 도장을 찍고 퇴근하겠다"는 공무원의 나약한 본성(나태함)을 정확히 찌른 결과였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방어적인 타 부서(또는 규제 기관)를 설득해야 할 때, 당신은 감정에 호소합니까, 아니면 그들이 반박하기 귀찮을 만큼 압도적이고 치밀한 '서류 폭탄(팩트)'을 들이밀어 항복을 받아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