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엘리트 카르텔이 틱톡에 무너지는 순간

ep.31_하버드 기안서를 찢어버린 '회장 조카'의 하품

by 김멀똑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가장 강력한 만국 공통어는
'유창한 비즈니스 영어'나
‘제도권 문화'가 아니라,
전 세계 10대들이 변기에 앉아
낄낄대며 스와이프 하는
'15초짜리 알고리즘'이다."




글로벌 1천억 프로젝트, 첫 번째 무대는 바로 미국.

나름 핵심(?) 인재인, 마테오, 링링이 함께 했다.


여기는 미국 뉴욕 맨해튼 50층 마천루.


메가-얼타(Mega-Ulta) 헤드쿼터 회의실. 미국 법인장 데이비드는 물 만난 고기처럼 100페이지짜리 영문 기안서를 화면에 띄우고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쏟아내고 있었다.


"타임스퀘어 메인 전광판 광고와 할리우드 앰버서더의 결합! 이것이 우리 K-뷰티가 미국의 '클래식한 헤리티지'를 리스펙트(Respect)하는 방식입니다. 총예산 500만 달러(약 65억 원)를 보장하죠."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메가-얼타의 수석 바이어 '조나단'이 만족스러운 듯 턱을 뵀다.


"Excellent, David. 역시 하버드 MBA 출신답게 미국 주류(Mainstream)의 문법을 정확히 아시네요. 요즘 아시아 브랜드들은 틱톡이니 뭐니 너무 가벼워서 문제였는데, 당신네 브랜드는 격조가 있습니다."


조나단과 데이비드는 마치 10년 지기 골프 파트너처럼 서로의 철학에 공감하며 '아메리칸 엘리트'들의 고상한 짝짜꿍을 이어갔다. 데이비드는 내게 '이것 보시라'는 듯 거만한 눈빛을 보냈고,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내 21년 짬바가 이 영어의 장벽 앞에서는 철저히 무력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회의실의 공기를 읽는 데는 도가 튼, 대기업 영업 바닥의 생존자였다. 데이비드와 조나단이 침을 튀기며 500만 달러짜리 전통 마케팅의 위대함을 찬양할 때, 내 동물적인 감각이 테이블 상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제시(Jessie)'라는 이름표를 단 20대 초반의 백인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공식 직함은 '글로벌 혁신 디렉터(Director of Innovation)'. 하지만 업계의 찌라시를 꿰고 있던 나는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메가-얼타 그룹 회장의 친조카이자, 경영 수업을 명목으로 꽂힌 최상위 낙하산(Nepo Baby)이었다.


재미있는 건 조나단의 시선이었다. 그는 데이비드와 대화하면서도 1분마다 한 번씩 제시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제시는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은 채,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은 쳐다보지도 않고 네온 컬러의 긴 손톱으로 스마트폰 화면만 멍하니 스와이프 하고 있었다.


그때, 제시가 아주 크고 명백한 '하품'을 했다. 조나단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고, 데이비드의 유창한 영어가 0.5초 정도 멈칫했다.


제시가 의자에 푹 기대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So... we're just doing what we did in 2015?

(그러니까... 우리 그냥 2015년에 하던 짓거리 똑같이 하자는 거네요?)"


"어... 디렉터님. 그게 아니라 이건 타임스퀘어라는 상징성이..."


조나단이 쩔쩔매며 변명하려 했다.


"Boring. (지루해.)"


제시가 펜을 툭 던졌다.


"애들은 셀럽 포스터 안 봐요, 조나단. 이딴 늙은 기획에 500만 달러 매대를 내어준다고요? 삼촌(회장님)이 참 좋아하시겠네."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조나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데이비드는 입술만 달달 떨고 있었다.

엘리트 카르텔이 무너진 완벽한 틈새. 나는 책상 아래로 마테오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지금이야. 물어!)


"어머~ 디렉터님 폰 케이스, '스키아파렐리' 이번 시즌 한정판이네요? 저 그거 구하려다 실패했는데!"


마테오가 핑크색 가디건을 펄럭이며 제시의 옆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제시가 처음으로 눈을 반짝였다.


"Oh, my god.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네?"


마테오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요염한 자세로 제시의 스마트폰 화면을 엿보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디렉터님! 500만 달러짜리 타임스퀘어? 완전 크린지(Cringe, 오글거림)하죠! 젠지(Gen Z) 감성 다 죽은 저 꼰대 오빠들 말 듣지 마요. 요즘 애들이 미치는 건 이런 거예요."


마테오가 자신의 아이패드를 스크린에 연결했다. 화면에는 조 상무가 싸놓은 악성 재고, '보라색 오일'을 얼굴에 쳐바르고 기괴한 테크노 음악에 맞춰 변기 위에서 춤을 추는 미국 중학생의 숏폼 영상이 떴다.


조나단과 데이비드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무... 무슨 미친 짓이야! 당장 꺼!"


하지만 상석의 제시는 달랐다. 그녀의 입술이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Wait. This is straight up bussin. (잠깐. 이거 완전 쩌는데?)"


마테오가 혀를 내둘렀다.


"조회수 1만짜리 언더그라운드 밈(Meme)이에요. 저 꼰대 오빠들이 사랑하는 '우아하고 비싼 세팅' 따윈 1도 없죠. 근데 10대들 화장실에선 지금 이 '어글리 뷰티(Ugly Beauty)'가 바이럴을 타고 있다고요."


"It's giving... chaotic good. (이거 완전... 혼돈의 선이네.)"


제시가 낄낄거리며 마테오의 아이패드를 뺏어 들었다. 하버드 MBA와 미국 수석 바이어가 지배하던 회의실의 헤게모니가, 순식간에 틱톡 밈을 공유하는 20대 젠알파 조카와 파스텔톤 게이 마테오에게로 완벽하게 넘어가 버렸다.


나는 데이비드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통역은 필요 없었다. 짧고 건방진 '단문'이면 충분했다.


"Jessie. You hate boring. I hate 5 million dollars."

(제시. 당신은 지루한 걸 싫어하고, 난 500만 달러 쓰는 게 싫습니다.)


내가 테이블을 짚고 제시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조나단은 안중에도 없었다.


"Give me your worst 3 stores. 2 weeks."

(파리 날리는 최악의 매장 3곳만 주시죠. 딱 2주면 됩니다.)


제시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계속해 봐요, 아저씨."

"우리 돈 딱 500달러(약 65만 원)만 써서, 그 매장에 이 보라색 괴물 크림 사려는 10대들 줄 세워 보일 테니까. If I fail, I give you 5 million dollars cash."

(내가 실패하면, 아까 말한 500만 달러 마케팅비 당신들 마음대로 쓰라고 현찰로 꽂아주지.)


데이비드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제시가 테이블을 탕 치며 일어났다.


"Bet! (콜!) 조나단, 당장 뉴저지 쪽에 죽어가는 매장 3개 빼줘. 이 미친 아저씨들이 2주 동안 어떻게 물을 흐리는지 구경 좀 하게."


조나단은 땀을 닦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디렉터님."





회의실을 나서는 데이비드의 영혼은 반쯤 빠져나가 있었다.


"본부장님... 2주 만에 500달러로 트래픽을 두 배를 띄운다고요? 실패하면 우리 본사 돈 65억을 토해내야 하는데, 제정신입니까?!"


나는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씩 웃었다.


"데이비드. 저 안에서 당신의 100장짜리 고상한 서류로 설득할 수 있는 건 조나단뿐이었어. 하지만 도장을 가진 진짜 주인이 틱톡을 원한다면, 똥물이라도 튀겨서 눈길을 끌어야지. 까짓 거 한 번 미친 듯이 튀겨보자고."


마테오가 유기농 미스트를 허공에 뿌리며 환호했다.


"꺄아! 제시 언니 완전 내 스타일! 제가 오늘 밤에 로블록스 게임 머니 풀어서 뉴저지 초딩들 싹 다 매장으로 집합시킬게요!"


링링이 걸어가며 안경을 고쳐 썼다.


"실패 시 K 본부장님이 65억 원의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구속될 확률 98.4%입니다. 데이터 타겟팅 즉시 시작하겠습니다."


"무서운 소리 하기는.. 너도 공범이야, 같이 조사받기 싫으면 마테오 옆에 붙어서 거들어"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꼭대기, 뉴욕. 그곳의 고상한 엘리트 룰을 깨부순 것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40대 아재의 미친 허풍과 권력자의 하품을 파고든 '15초짜리 틱톡 숏폼'이었다.


65억을 담보로 한 K팀의 지독한 똥꼬쇼가, 뉴욕 한복판에서 시한폭탄의 타이머를 누르고 있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Q1. 당신은 '논리'를 설득합니까, '권력'을 설득합니까?

완벽한 100장짜리 보고서가 거절당하는 이유는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회의실 안의 '진짜 결정권자'가 무엇에 지루해하고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지, 그 본성을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시선은 조직도상의 '직급'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판을 뒤집을 '진짜 욕망'을 쫓고 있습니까?


Q2. '우아한 실패'를 변명하겠습니까, '조악한 성공'을 증명하겠습니까?

하버드 MBA의 프레젠테이션은 엘리트의 자존심을 지켜주지만, 결국 시장의 지갑을 연 것은 15초짜리 촌스러운 틱톡 영상이었습니다. 비즈니스의 야생에서는 품위보다 생존이 먼저입니다. 당신은 지금 일을 '전문적으로 보이게' 포장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까, 아니면 체면을 버리고서라도 기어코 '결과'를 꽂아 넣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까?


Q3. 당신은 판을 엎기 위해 '자리(목숨)'를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K가 던진 65억짜리 배팅은 단순한 허풍이 아닙니다. 견고한 기득권의 벽을 깨부수기 위해, 리더가 자신의 숨통(책임)을 담보로 던진 처절한 승부수입니다. 당신은 핑계를 대며 안전한 온실의 부품으로 남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벼랑 끝에서 팀을 뛰게 만드는 진짜 리더가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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