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_65억짜리 뻥카와 로블록스 용병단
"백조가 수면 위에서 우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수면 아래에서 발가락에 피가 나도록
물장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맨해튼 외곽의 싸구려 호텔 방.
페퍼로니 피자 냄새와 식은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데이비드는 아까부터 좁은 카펫 위를 맴돌며 자신의 톰 포드 넥타이를 쥐어뜯고 있었다.
"본부장님, 제정신입니까? 실패하면 500만 달러를 메가-얼타에 꽂아주겠다고요? 본사에서 알면 우린 당장 구속입니다!"
나는 대답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서울은 아침이었다.
화면 너머로 곽 필립 상무가 요가 매트 위에서 따뜻한 물을 마시며 웃고 있었다.
"상무님. 미국 외곽의 죽은 공간(Dead Zone)에 우리 브랜드의 '보라색 오라(Aura)'를 아방가르드하게 심으려 합니다. 본사 예산 500만 달러를 일종의 '영적 담보물(Spiritual Liability)'로 세워두는 결재가 필요합니다."
"C'est parfait! (완벽해요!) 영적 담보물이라니. K, 당신의 전위적인 기획, 내가 보증하죠."
가장 무능한 리더가 가장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는 순간. 나는 조용히 화상 통화를 종료하고, 곧바로 방콕에 있는 거물 디스트리뷰터 쏨차이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Mr. 쏨차이. 마이 브라더! 방콕 창고에 썩고 있는 그 보라색 오일 3,000개, 당장 DHL 항공편으로 뉴욕에 쏴주라. 마진율 2% 더 얹어줄게."
스피커폰 너머로 쏨차이의 건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 K. 미안해서 어쩌나. 방금 중국 따이공(보따리상)들이 그거 헐값에 다 쓸어가기로 했어. 뉴욕으로 비행기 띄울 시간도 없고 귀찮아. 수고해."
뚜- 뚜-. 전화가 끊겼다.
데이비드가 "거 봐요! 끝났어!"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65억짜리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는데, 폭탄을 터뜨릴 화약(재고)이 태국에서 묶여버렸다. 나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며 위장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하아... ㅈ 됐다.. 쏨차이 이 새끼를 어떻게 족치지."
내가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을 때, 카카오톡 팝업이 울렸다. 이제 막 출근 중이던 최 부장이었다. 협상 직후 링링이 보낸 메시지 온 답변이다.
[최 부장: 야, 사고는 맨날 니들이 치고, 똥 치우는 맨날 내 몫인 거지?]
[K : 누님, 살려줘요, 이거 안되면, 천억이고 뭐고 우리 다 죽는 거야..]
[최 부장: 진상이다, 진상.. 기다려봐바]
5분 뒤, 최 부장이 모텔 방으로 보이스톡을 걸어왔다. 그녀는 내게 말하는 대신, 누군가와 통화 중인 자신의 휴대폰 스피커를 내 쪽에 들려주고 있었다.
태국어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 쏨차이의 아내였다.
최 부장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다정하고 교양 넘쳤다.
"어머, 사모님~ 한국의 최 부장이에요. 이번 주말에 딸내미 데리고 압구정 코 수술 오신다면서요? 내가 우리 병원 대표원장님 수술, 제일 좋은 시간대로 싹 빼놨지~"
"오! 땡큐 미세스 최! 너무 고마워요!"
"근데 사모님, 어쩌지? 쏨차이 오빠가 우리 회사 물건을 뉴욕으로 안 보내준다네? 나 문책당해서 짤리게 생겼지 뭐야. 나 짤리면 그 수술 대기, 500번 밖으로 밀려날 텐데... 딸내미 코 수술 못 하고 방콕 돌아가면 어떡해?"
전화기 너머로 사모님의 날카로운 비명(태국어)과,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 그리고 쏨차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10분 뒤. 내 휴대폰이 울렸다. 쏨차이였다.
[DHL 특송 지금 공항 출발함. 제발 최 부장한테 예약 취소하지 말라고 전해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데이비드를 쳐다보았다. 하버드 MBA 출신 법인장의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나는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툭 내뱉었다.
"봤지? 엘리트 변호사 백 명보다, 딸내미 코 수술 쥐고 흔드는 K-아줌마 카톡 한 방이 더 무서운 법이야."
물건이 오고 있다. 이제 뉴저지 매장에 애들을 끌어모을 차례.
모텔 방의 불이 꺼지고, 링링과 마테오의 노트북 모니터 불빛만이 형광등처럼 빛났다.
링링이 핏발 선 눈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타겟 매장 3곳, 반경 5km 이내 중학교 IP 정밀 타겟팅 완료. 예산 500달러 중 100달러를 게릴라 지오펜싱(Geo-fencing) 광고에 태웁니다."
마테오가 네일아트가 된 손톱으로 아이패드를 탁탁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어머, 뉴저지 초딩들 완전 귀여워. 링링 대리님, 저기 조지워싱턴 중학교 댄스 동아리 애들한테 DM 다 보냈어요."
데이비드가 화면을 훔쳐보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당신들 제정신입니까?! 10대 애들한테 현찰도 아니고 '로블록스(Roblox) 게임 머니'를 준다고요?! 메가-얼타 바이어가 알면 우릴 고소할 겁니다!"
마테오가 요염하게 눈을 흘겼다.
"꼰대 법인장님, 현찰 줘봤자 엄마한테 뺏겨요. 걔네들한테 진짜 화폐는 달러가 아니라 로블록스 화폐(Robux)라고요. 조용히 해요, 지금 틱톡 챌린지 터지기 시작했으니까."
창밖으로 뉴욕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버드의 거창한 마케팅 이론은 없었다. 65억짜리 판돈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모텔 방에서 밤을 새우며 10대들의 게임 머니를 쏘아 올리는 기괴한 진흙탕을 뒹굴고 있었다.
2주 뒤. 뉴저지 외곽의 메가-얼타 '데드존' 매장.
조나단(수석 바이어)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거만한 걸음으로 우리와 함께 매장 입구로 걸어왔다. 그의 얼굴엔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비웃음이 장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매장 코너를 도는 순간, 조나단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파리만 날리던 매장 입구. 수십 명의 10대 남녀 학생들이 아우성을 치며 진열대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쟁하듯 조악한 '보라색 오일'을 집어 들더니 자기 얼굴에 시럽처럼 떡칠을 하고, 휴대폰을 켠 채 기괴한 '스킵비디(Skibidi)' 춤을 추고 있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조나단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이 트래픽은 어디서 솟아난 겁니까?"
내가 구겨진 양복 마이를 탁탁 털며 그에게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할리우드 셀럽 없이도 애들 발소리 채워준다는 약속, 지켰습니다. 자, 이제 메인 매대 수수료 없이 비우시죠."
조나단이 마른침을 삼켰다.
"좋습니다, K. 타임스퀘어 본점 포함해서 5개 매장 내어 드리죠."
겨우 5개?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때였다. 내 옆에 서 있던 링링의 스마트폰이 짧게 울렸다.
링링이 안경을 척 치켜올리더니, 건조한 기계음 같은 영어로 내게 보고를 시작했다. 조나단이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볼륨이었다.
"저.. 본부장님. 아마존(Amazon) 뷰티 총괄 매니저에게서 긴급 이메일이 왔습니다, 아.. 근데"
".. 뭔데?"
"아니, 보라색 오일의 틱톡 트래픽을 감지했다며, 당장 아마존 물류창고에 재고 5만 개를 꽂아주면 '아마존 프라임 메인 배너'를 무상으로 열어주겠다 합니다, (속삭이며) 그래서 말인데, 5만 개면.. 이게.."
"야, 그래도 일단 여기 조나단이랑 얘기 중인데, 매장은 다.. 다섯 개 밖에는 안되지만"
"비즈니스는 감정이 아니라, 숫자로.."
"아니!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일단은.."
순간, 조나단의 동공에 진도 8.0의 지진이 일어났다.
오프라인 유통의 제왕에게 '아마존'이라는 단어는 밥그릇을 빼앗기는 가장 끔찍한 공포(FOMO) 그 자체다.
"Wait!! (잠깐!!)"
조나단이 이성을 잃고 내 팔을 움켜쥐었다.
"5개 매장 취소! 미국 전역 핵심 매장 '50곳'의 메인 매대(End-cap)를 무상으로 싹 비워드립니다! VMD(인테리어) 비용도 우리가 전액 부담하죠. 대신, 아마존엔 단 한 방울도 납품하지 않겠다는 독점(Exclusive) 조항에 지금 당장 사인하십시오!!"
나는 짐짓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 미간을 찌푸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인하죠."
맨해튼의 칼바람이 부는 50번가 거리.
데이비드는 수수료 0원, 비용 전액 지원이 적힌 '50개 매장 입점 계약서'를 가슴에 안고 덜덜 떨고 있었다.
"세상에... 하버드 케이스 스터디에서도 이런 협상은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아마존이 정확히 그 타이밍에 메일을 보낸 겁니까?"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웃으며 링링을 돌아보았다.
"링링아. 얘기해 드려~ "
링링이 휴대폰 화면을 꺼서 주머니에 넣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 이메일은.. 아마존 셀러 가입하면 매일 오는 자동 스팸 메일 알람이었습니다. 발신자가 'Amazon'으로 찍히기에, 바이어의 청각을 자극할 'FOMO(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타격용'으로 실시간 번역창을 띄워 지어내 읽어드렸을 뿐입니다, 뭐 저는 회사를 오래 다녀야 하니깐요.."
마테오가 길 한복판에서 배를 잡고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비드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는 멍해진 데이비드의 어깨를 툭 쳤다.
"데이비드. 이게 100장짜리 기안서 뒤에서 굴러가는 진짜 비즈니스야. 우아한 척 백조처럼 떠 있으려면, 물밑에선 똥물 튀겨가며 사기라도 쳐야 살아남는 법이지, 뭐 당신처럼 컨설팅만 하면서 숫자로 그림 그리는 사람은 절대 이해 못 하는 그런 세계지, 이 바닥이 "
화려한 자본주의의 심장, 뉴욕. 하지만 엘리트들의 고상한 룰은 10대들의 게임 머니와 아줌마의 협박, 그리고 데이터 소시오패스의 스팸 메일 뻥카 앞에 완벽하게 털려버렸다.
서울에서 샹송을 부르는 곽 상무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아방가르드한 철학이 거둔 승리'라 칭송할 생각을 하니,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사기극의 첫 단추가, 지독하게 아름답고 천박하게 끼워졌다.
Q1. 우아한 파멸입니까, 천박한 생존입니까?
기득권의 룰은 언제나 우아함을 강요하지만, 야생의 비즈니스는 종종 진흙탕을 구를 것을 요구합니다. 당신의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우아하게 실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기어코 '천박하게 살아남으시겠습니까?'
Q2. 당신의 곁에는 '추종자'가 있습니까, '공범'이 있습니까?
조직이 벼랑 끝에 섰을 때 필요한 것은, 지시를 따르는 착한 부하 직원이 아니라 함께 룰을 깨부술 파트너입니다. 파국을 각오하고 당신이 금지된 선(線)을 넘었을 때, 기꺼이 진흙탕에 뛰어들어 줄 '공범'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