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의 '해맑은 무능'은 무죄?

ep.30_곽필립이란 백지수표

by 김멀똑

"현재 우리 국내와 글로벌 매출 볼륨 500억. 향후 3년 안에 1,000억으로 '퀀텀 점프(Quantum Jump)' 한다. 이것이 본사가 통합 본부에 내린 특명입니다."


월요일 오전, 전사 핵심 부서가 모두 모인 대회의실.

스크린에 띄워진 육중한 목표 수치를 보며 생산 부장과 물류 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500억에서 1,000억. 공장 라인을 두 배로 늘리고, 컨테이너를 쏟아부어야 가능한 물리적인 전쟁의 서막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을 깬 것은, 상석에 앉은 신임 상무 곽 필립(Philip Kwak)이었다. 그는 한겨울임에도 맨발에 로퍼를 신고, 파스텔 톤 리넨 스카프를 두른 채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물(L'eau chaude)'을 홀짝였다.


"1,000억... 숫자가 너무 세속적(Secular)이네요."


곽 상무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세안 대륙에 우리 브랜드의 '오라(Aura)'를 덮고 싶습니다. 생산 수량이나 물류비 같은 바이너리 한 잣대 말고, 영혼의 주파수를 맞춰보죠. 베트남의 매연 속에서도 우리 앰플이 '샹송(Chanson)'처럼 우아하게 흐르게 하세요. 인도네시아의 적도 열기 속에서는 몽마르트의 새벽 공기처럼 다가가야 합니다."


회의실의 산소가 급격히 줄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중소기업의 부서장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노하는 대신, 상사의 이 난해한 철학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생업'에 끼워 맞추려 필사적으로 뇌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평생을 공장 쇳가루 속에서 살아온 생산 부장이었다.

그는 굵은 손가락으로 볼펜을 돌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상무님. 샹송처럼 부드럽게 흐르려면... 화장품 용기 펌프의 압력을 낮춰서 토출량을 줄일까요? 1회 펌핑 당 0.5cc로 금형을 다시 세팅하면 꽤 우아하게 흐르긴 합니다만, 펌프 단가가 개당 15원씩 올라갑니다."


어딘가에서 '풉'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곽 상무가 뜻밖의 물리적 접근에 큰 눈을 꿈뻑이는 사이, 옆에 있던 물류 팀장이 태블릿을 두드리며 치고 들어왔다.


"베트남 호치민 하역장 쪽에 오토바이 매연이 심하긴 하죠. 그럼 샹송의 무드를 지키기 위해, 라스트 마일(최종 배송)을 4.5톤 디젤 트럭 대신 전기 삼륜차나 친환경 툭툭이로 쪼개서 배차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면 인도네시아와 태국 물류망까지 싹 다 뒤집어야 하는데, 물류비가 12% 상승합니다."


해맑은 철학자와 뼛속까지 이과인 실무진들의 대환장 충돌.


그때, 곽 상무의 헛소리에서 가장 완벽하게 돈 냄새를 맡은 뷰티 마피아, 마테오가 화려한 핑크색 가디건을 펄럭이며 박수를 쳤다.


"어머, 상무님! ¡Magnífico! (멋져요!) 베트남의 매연을 뚫는 샹송! 인도네시아 적도에 내리는 몽마르트의 새벽! 그 멜랑꼴리 한 무드를 틱톡(TikTok) 숏폼으로 풀면 아세안 Z세대들 영혼이 아주 뒤집어질 거예요. 당장 태국이랑 인니 인플루언서 100명 섭외해서 앰버서더 시딩(Seeding) 들어갈게요. 샹송의 철학을 담으려면 B급 말고 S급 써야 하니까, 마케팅 예산 초도에 5억만 태워주세요!"


마테오가 요염하게 눈웃음을 치자, 곽 상무는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알아주는 직원을 만났다며 감격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C'est parfait! (완벽해요!) 예술에 비용을 아끼면 안 되죠. 진행하세요, 마테오."


마테오는 책상 아래로 내게 슬쩍 윙크를 날렸다. 멍청한 방패를 이용해, 그동안 번번이 재무팀에 깎이던 아세안 Z세대 타겟 마케팅 예산 5억을 그 자리에서 하이패스로 뚫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공장에서는 0.5cc짜리 이상한 펌프를 찍어내고, 배송망은 툭툭이로 도배되어 물류비가 폭발할 판이었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상무님의 위대하고 아방가르드한 철학을, 제가 실무 단위의 숫자로 '디벨롭(Develop)' 해보겠습니다."


나는 보드마카를 들고 1,000억이라는 숫자 밑에 3개의 기둥을 그렸다. 21년 짬바의 '개소리 통역기'가 풀가동되는 순간이었다.


"김 부장님. '샹송처럼 흐르는 토출량'은, 베트남과 태국 시장을 겨냥한 [소용량 트래블 키트(15ml) 라인 증설]을 의미합니다. 기존 50ml 대용량 대신, 가볍게 휴대하며 흐르듯 바를 수 있는 제품이죠. 객단가를 낮춰서 10대 후반까지 타겟을 넓히고 회전율을 극대화하는 전략입니다. 초도 물량 30만 개 세팅하시죠, 어떠세요?"


생산 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하! 소용량 트래블 키트! 금형 수정 없이 기존 샘플 라인 돌리면 되니까 마진율 엄청 좋지! 30만 개 픽스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물류 팀장을 향해 마커를 겨누었다.


"박 팀장님. '몽마르트의 새벽 공기'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통관 라인을 뚫으라는 뜻입니다. 열대 기후에 제품이 상하지 않도록, 일반 드라이 컨테이너 대신 [리퍼(Reefer, 냉장) 컨테이너]를 써서 프리미엄 라인의 온도를 유지하십시오. 물류비 12% 오르는 건, 현지 마테오의 틱톡 브랜딩을 얹어서 도매가 15% 인상으로 커버 칩니다, 어때요?"


물류 팀장이 무릎을 탁 쳤다.


"하아, 리퍼 컨테이너! 역시 상무님 철학이 깊으시네. 품질 유지해서 프리미엄으로 간다, 오케이. 자카르타 냉장 라인 부킹(Booking) 당장 걸겠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맑아졌다.


"상무님.. 말씀대로 이렇게 해보면, 저희 비젼 2년 안에도 가능하겠는데요? "


내가 말하면서도, 내 메소드 연기에 감탄했다.

이제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K, 바로 그거예요~! 내가 말한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 전략! perfect!!"


해맑은 곽필립은 금으로 덧씌운 어금니까지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네, 그럼 저희 부서도 이 전략에 맞춰서 현지 파트너들과 타겟 세팅해 보겠습니다"


생산 부장과 물류 팀장은 명확한 숫자와 목표(Specs)를 얻어 홀가분해졌고, 마테오는 두둑한 실탄(예산)을 챙겼으며, 곽 상무는 자신의 철학이 전사에 완벽하게 렌더링(Rendering) 되었다고 믿으며 흐뭇하게 따뜻한 물을 마셨다.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타 부서장들이 "본부장님 덕분에 살았다"며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우리 본부 멤버들만 남은 회의실. 남대문의 갓마더 최 부장이 믹스커피를 훌쩍이며 헛웃음을 쳤다.


"야, 강 본부장. 너 입에 모터 달았냐? 방금 베트남 소용량 키트랑 인니 냉장 컨테이너, 그거 네가 저번 달부터 윗선에 하자고 기안 올렸다가 까인 거잖아. 그걸 저 양반 '몽마르트' 타령에 얹어서 통과시켜?"


내가 화이트보드의 마커 자국을 지우며 씩 웃었다.


"부장님. 멍청한 리더는 재앙이지만, 허영심 많은 멍청한 리더는 우리에게 완벽한 '백지수표'에요, 보세요 이제 성과도 쭉쭉 나올 겁니다"


나는 팀원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었다. 탈모가 오던 양 과장도, 계산기만 두드리던 링링도 내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지금부터 글로벌 1,000억 플랜은 철저히 우리 통제하에 굴러갈 거야. 앞으로 모든 기획서엔 '오라', '바이너리', '샹송' 같은 단어만 무조건 넣어. 알겠지? 책임과 결재는 곽 상무의 '영감'이 지고, 그 뒤에서 벌어들이는 진짜 실적과 글로벌 네트워크 장악은 우리가 하는 거야."


회사라는 거대한 카지노.

무능한 상층부가 뜬구름을 잡으며 우아한 광대짓을 하는 동안, 우리는 그들이 던져준 예산과 인프라를 한계치까지 빨아먹으며 진짜 비즈니스를 키울 것이다.


창밖으로 판교의 빌딩 숲이 번쩍였다. 1,000억이라는 아득한 숫자가, 더 이상 회사의 목표가 아닌 '미래의 내 창업 자본'을 증명할 거대한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관점의 전환을 위한 질문들]


Q1. 상사의 '헛소리'에 분노하십니까, '마법의 포장지'로 역이용하십니까?


Q2. '무능한 상사'는 조직의 재앙입니까, 내게 주어진 '백지수표'입니까?


Q3. 회사의 벅찬 목표를 '착취'로 견디십니까, 내 사업을 위한 '무료 테스트'로 훔치십니까?


Q4. 어쩌면 나도 무능한 상사일까요? '헛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나만의 팁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