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립니다.” 종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알림 메시지.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평소 읽었던 판타지 소설처럼 양쪽으로 열리는 문 사이로 서서히 보이는 넓은 초원과 화려한 꽃밭, 혹은 고딕풍으로 줄 세워 지어진 뾰족한 건물들을.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회색의 콘크리트 바닥과 차가운 공기와 마주친다.
그럼에도 내가 직접 문을 만들어 다른 공간으로 가는 짧고 긴 순간이 있다. 간편한 옷을 입고, 며칠 치 생활용품을 빽빽하게 담은 캐리어를 끌고 하늘을 날아가는 순간이다. 영공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깨끗한 맛집만을 골라 다니던 까탈쟁이가 길거리 음식 마니아가 되어보기도 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택시를 타던 심신 미약자가 하루에 이만 보를 걷는 순례자가 되기도 한다.
2020년 어느 가을날, 낯선 여행객 두 명은 튀르키예에 첫 발을 디뎠다. 엄마와 함께하는 장기 해외여행이 처음이라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우리 둘 다 튀르키예 말은 하나도 할 줄 몰랐기에 영어 또는 불완전한 번역기로만 현지 사람들과 소통하여야 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몇 년 전 받게 된 영어영문학과 졸업장 때문이었을까, 나는 걸음걸음마다 두려움을 버리고 당돌한 모험가가 되었다.
난생처음 보는 꼬부랑 글자가 거리에 수놓아져 있었고,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우릴 쳐다보며 다가왔다. 한국이었다면 이상하게 느껴질 시선들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옷을 입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내가 서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대략적인 여행 계획을 짜놓았지만 현지에서는 역시나 변수의 연속이었다.
안탈리아 박물관에서 나는 엄마를 위한 개인 도슨트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석상과 조각을 보며 짧은 지식을 뽐내다가 박물관에 있는 대부분의 석상들이 ‘페르게’라는 곳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엄마에게 전달하는 순간, 엄마의 눈이 먹이를 찾은 야수처럼 빛났다. 꿈을 찾은 소녀처럼 엄마는 ‘그 페르게’에 가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벼락 맞은 한 마리의 가련한 고라니처럼 괴성을 내질렀다.
평상시 나는 변수에 강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변수에 강한 나’가 아니라 변수를 잘 다룰 수 있을 만큼 ‘많이 아는 나’였던 뿐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페르게 벼락을 맞고 정신 놓은 고라니는 새로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방법으로 정신줄을 잡아야만 했다. 손가락을 신속하게 움직여 페르게 관광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니 잠시 유체 이탈했던 여유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페르게에 가기 전 버터에 튀겨진 듯한 새우와 땅에서 잡았는지 비린내 하나 없는 물고기를 흡입했다. 든든한 배를 부여잡고 트램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아뿔싸! 트램을 타고 교통카드를 찍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교통카드 충전금액이 바닥난 것이다. 이 트램을 놓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교통카드 충전소는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고 튀르키예의 태양은 돋보기에 갇힌 우리에게 맹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당황한 그 순간 엔젤링을 감춘 한 여성분이 대신 카드를 찍어주었다. 나와 엄마는 연신 ‘테셰큘레’를 외쳐댔고 천사의 현신인 그녀는 싱긋 웃으며 쿨하게 자리에 앉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페르게는 돌땡이의 연속이었다. 엄마는 만족스러운 듯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보며 튀르키예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런 엄마를 보며 나는 일생일대의 효도를 행한 것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평소 ‘효년’이었던 내가 ‘효녀’로 변한 순간 중 하나였음에 분명하다. 돌멩이의 끝은 원형극장으로 향했는데, 원형극장에서 엄마와 나는 배우라도 된 것처럼 뛰고, 웃고, 즐겼다. 우리의 우당탕탕 페르게 여행은 튀르키예의 첫날과 함께 끝이 났다.
이후 약 8일간 튀르키예의 4개 지역을 유랑했고, 형제의 국가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튀르키예 여정의 마지막 날, 엄마와 나는 돌아갈 곳이 달랐다. 아시아를 벗어난 여행이 처음인 엄마는 다시 아시아로, 이후의 여행이 예정된 나는 아프리카로, 각자가 또 한 번의 여행을 치러야 하는 셈이었다. 다행히 각자의 여행은 안전하게 끝이 났고 3주 간의 일정 끝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문이 닫힙니다.” 종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알림 메시지. 낯설지만 그리운 풍경이 닫히는 순간이다. 닫힌 문이 열리면 익숙한 잿빛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즐기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했던 시간과 공간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평범하고, 진부하고, 고루한 세상에 편입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음속 한 켠에 또다시 마주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를 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