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시간의 해석
관계의 끝엔 늘 질문이 남는다. 그 사람도 나처럼 진심이었을까. 순간의 진심도 진심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일수록 자꾸 묻게 된다. 끝내 확인할 길이 없으니, 아픔만 지속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어딘가 어긋나 있다. 감정의 진실만을 묻고, 마음의 시차는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만 사는 하루살이에겐 단 몇 분도, 그 작은 생의 전부나 다름없다. 반면 백 년을 사는 바다거북이에겐 그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한 시간을 겪더라도 받아들이는 감각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마음은 같았어도 그 감정을 살아낸 시간의 해석이 뒤틀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잠시나마 위안이 된다. 순간의 진심도 진심이다. 짧았다고 덜 진심은 아니다. 모든 것은 참된 마음이었다. 다만 그 감정이 머무는 흐름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을 뿐.
중요한 건 진심의 유무가 아니라, 시간의 길이감이다. 순간의 진심을 의심하게 될 땐, 초점을 '진심'이 아닌 '순간'에 맞춰야 한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체감은 제각각이다. 누군가에겐 순간이 몇 개월짜리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영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에서 녹아내리는 시계들이 시간의 개념을 비틀어 놓듯이, 마음속 시간 또한 각기 다른 형태로 흐르는 것이다.
허상 같은 타인의 감정을 억지로 헤아리기보다, 차라리 시간 탓으로 돌린다. 비교의 기준이 여왕처럼 도도한 시간이라면, 그 앞에 굴복한다 해도 조금은 덜 억울하겠다.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흐름 속에서 엇박으로 빗겨난 것이다. 진심의 부재가 아니라, 시차였다. 길든 짧든, 간격의 문제.
명제를 다시 세운다. 그 모든 건 진심이었다. 차오르는 원망은 시간에게 떠넘기기로 한다. 모두가 동등하게 무릎 꿇는 여왕을 핑계 삼으니, 나를 찌르던 상처에 반창고라도 붙인 듯 잠시나마 덜 쑤신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너와 나의 '순간'의 더께가 얼추 비슷하기를. 간극이 너무 크지 않기를. 그래야 남겨진 이가 미련이라는 감옥에 덜 오래 갇힐 테니.
표지 이미지: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소장. (본인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