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과 현과 새롭게 친해졌다. 친해지면서 전쟁통에도 사랑이 피듯이 어느 통에든 우정도 핀다고 느끼게 되었다. 근 세 달간 일주일에 서너 번을 거뜬히 만나며 우리는 급격하게 가까워진 것이다. 셋이 집에 같이 가는 날엔 탕후루를 열심히 사 먹었다. 탕후루 한 줄씩을 횡단보도 하나를 건널 동안 금세 다 먹고 나머지 길 위에서는 탕후루 꼬챙이를 검처럼 휘두르거나 마법 지팡이처럼 돌리면서 걸었다. 그리고 루틴처럼 길 끝에 있는 은행 ATM기 앞 쓰레기통에 꼬챙이를 삼등분해서 넣었다. 혼자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그들에게 할 말을 모아뒀다가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느슨하게 내뱉는다. 흘려들어줬으면 하고 바라는 표정으로 꼼꼼하게 힘주어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늘 까먹어서 네가 그런 말을 했었어? 언제?라는 대답을 달고 사는 내가 그 둘에게는 그렇게 말한 뒤에 아 미안 미안을 꼬리말로 꼭 붙여 말한다. 그 둘에게는 의식하지 않고 새어 나오는 나의 작은 무성의함을 들키고 싶지 않다.
며칠 전에는 셋이서 영화를 봤다. 나와 현이 너무나도 기다리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였다. 현은 그저 오랜만의 애니메이션이 기대되어서 보고 싶어 했고, 나는 진지하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것도 몰라서 구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보고 싶어 했다. 그 두 보고 싶음 사이에서 혁은 아마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걔는 자주 그랬다. 딱 봐도 좋아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말미에는 그게 뭐든 가장 좋아서 진심으로 참여하는 애이기도 했다. 아마 혁은 애니메이션도 나쁘지 않고, 어떻게 살지도 나름 궁금해서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을 것이다.
영화관에는 우리 셋 밖에 없었다. 70석이 넘는 영화관 속 우리는 한 쪽 구석에 주르륵 3명이서 앉았다. 왜 이런 구석탱이를 예매했어?라는 내 물음에 혁은 앞뒤로는 둘이서 앉는 커플석 밖에 없고 자기는 원래 구석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런 나와 혁 사이에 앉은 현은 자기 얼굴만 한 캐러멜 팝콘과 자기 팔뚝만 한 아이스티를 야무지게 들고 있었다. 이런 현을 옆에서 보고 있는 시간이 주어질 때 나는 학창 시절을 다시 겪는 사람이 된다. 어딘가에 놓고 온 희미한 기억들이 현을 거치면 다시 선명해진다. 나도 학창 시절을 겪어 봤던 사람이라는 실감이 샌다.
그래서 그런지 혁과 현을 만나면 나라는 사람이 자꾸 더 유치해진다. 우리밖에 없는 영화관에서 괜히 크게 웃어본다거나 영화관 의자를 눕혔다가 세웠다가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 제일 심하게는 팝콘을 위로 던져 내 입속에 넣는 묘기를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단연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써보지 않았던 말투를 자연스레 입에 올리게 된다. 누가 말이라도 한 번 잘 못하면 말꼬리를 길게 물어뜯으며 시비를 걸게 된다. 당사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보면 상처만 보일 대화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걔네 앞에서 이 말투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걔네도 나랑 똑같아서 고치면 나만 대화에 못 끼게 될 것이 분명해서다.
두 시간 반 동안 영화가 끝나고 현과 나는 호들갑을 떤다. 이건 이랬지 저건 저랬지 우리가 맞았지 여긴 살짝 반전이었지 감동스러웠지 근데 솔직히 좀 띠용인 부분도 있었지 하면서 둘의 맞장구는 화장실 문 앞까지 이어진다. 그런 사이에 혁은 머리를 긁으면서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자기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혁에게 현은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라며 숏폼 좀 그만 보라고 명쾌한 해답을 날렸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나서 그들과 연을 날렸다. 올해의 소소한 버킷리스트 100에 담겨 있는 '연날리기'가 현과 하기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위해 며칠 전에 스마일 연, 독수리 연, 나비 연. 3개의 연을 쿠팡으로 주문해놨었다. 혁은 독수리 연을 고르고, 현은 스마일 연을 골랐다. 현과 함께라면 늘 나머지 중에 나머지를 맡아도 좋을 내가 남은 나비 연을 골랐다. 연 3개를 가방에 쑤셔 넣고 와서인지, 연을 만들기도 전에 현의 스마일 연이 망가져 있었다. 가운데를 지지하는 나무가 부러진 채로 발견된 스마일 연 앞에 선 현에게 나는 자연스럽게 내 나비 연을 건넨다. 그러고는 내가 열심히 뛰어다닐게 얼레 잡아! 연 컨트롤해 줘!라고 말했다.
현과 나의 연이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어들 동안 그것도 몰랐던 혁은 자기 독수리 연에만 집중한다. 이제 다음 할 일은 연을 날리는 거라고 했을 때 혁은 나를 흘깃 째려보면서 그런 건 초등학생 때나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패딩에 목을 한 껏 집어넣으며 누가 이 밤에 호수에서 연을 날립니까?라고도 했다. 그랬던 애가 나한테 자기 독수리 이렇게 만드는 거 맞냐며 줄 좀 제대로 묶어달라고 금방 맘을 바꿔 말했다. 그러면 나는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며 혁을 몸통으로 힘껏 밀치고 혁의 연을 매만져줬다. 꽝꽝 언 손을 비비지도 않고 곧장 가서 독수리 연의 제대로 된 구멍에 제대로 된 막대를 꽂아주고 끊어지지 않게 줄을 세 번은 꽝꽝 묵어줬다.
몸 만한 두 개의 연과 세 명의 사람이 호수를 걸어갔다. 분명 날씨는 전날 보다 추운데 바람은 전날보다 덜 불었다. 연날리기는 쉽지 않았다. 연을 정말 옆 건물의 옥상에 닿을 듯 말 듯 높이 올려놓고 여유롭게 얼레를 감았다 풀었다 하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바람이 없어서인지 우리가 미숙해서인지 나비와 독수리가 혼자서는 전혀 날지 않았다. 동물들은 커다란 몸이 불쌍해지도록 계속 머리를 땅으로 처박기만 했다. 현과 나는 바람을 끈질기게 기다려서 한 번의 우아한 수동적 연날리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고, 혁은 늘 그렇듯 갑자기 또 혼자 진심을 쏟아서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바람을 만들어내는 능동적 연날리기를 이뤄내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서로 자동으로 쏟아내던 비아냥도 거둔 채 연에만 몰입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추위도 잊고 생각도 잊고 각자의 나이도 잊고 각자의 직업도 잊고 각자의 집도 잊는 시간과도 같았다.
연날리기를 성공했다고 해야 할지 실패했다고 해야 할지 갸우뚱거리며 연날리기를 끝냈다. 독수리랑 나비를 쓰레기통에 넣고 갈까 하다가 거기까지 처박히게 하긴 안쓰러워서 잘 해체에서 원래 들어있던 비닐에 넣었다. 연을 모두 현에게 맡기며 다음에 우리가 찾아갈 때까지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다. 그제야 서로의 얼어버린 손을 발견하고 혁과 나는 현을 집에 데려다준다. 그리고 내가 혁의 신호등을 기다려주고 나는 파란 불이 되자마자 너무 추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나와 나이 차이가 1살, 10살 이렇게 난다. 위로인지 아래인지는 상관없다. 나에게는 내가 이들의 미래를 궁금해한다는 점이 아주 상관있다. 5년 뒤에 그들이 어떤 얼굴을 가지고 말을 할지, 또 어느 집단에 속해서 어느 말투를 기본으로 장착해왔을지. 그리고 그들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을 땐 얼굴과 말투도 함께 돌아올지, 그들이 옆에 있는 지금부터 궁금하다. 새롭게 친해진 사람들은 멀어질 때도 새롭게 멀어질까 하는 나쁜 호기심도 든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과 멀어지기 전에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젊어지고 싶은 걸 넘어서 어려지고 싶을 때마다 둘 중 하나를 부르고 싶다. 그러고는 백설 공주의 마녀처럼 너의 젊음을 나눠달라고 보챌 거다. 그럼 얘네는 아마 나팔거리면서 나를 약간 조롱하면서 놀아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