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력구제기
올해엔 '즉흥적으로 살자'라며 맘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유일하고 고독한 한 줄이었다. 이래도 되나? 되나? 싶은 순간에는 대부분 이랬다. 그랬더니 결론적으로는 한 해 내내 생각보다 큰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꽤나 성실하게 간호사로 일을 하다가 이건 진짜 아닌 것 같다. 이건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 내가 곧 나를 싫어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스미자마자 바로 수간호사실 문을 두드렸다. 마음먹은 대로 퇴사를 하고, 언제든 가고 싶은 곳으로 차도 없이 훌쩍 떠나서 1주, 2주 정도를 머물렀다. 카카오 맵만 있으면 어디든 내 목적지가 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더 알아보지 않고 앱이 알려주는 파란색 길을 내 발에 맞추었다. 꽤 많은 지름길과 관광명소를 지나쳐가며 걷고 버스를 타고 자전거를 굴렸다.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도 정해지지 않은 채로. 그날 오후 10시에 몸을 뉠 곳을 오후 4시쯤 카페에서 앱을 뒤적거리며 찾아냈다. 그렇게 찾고 결제한 방 안에서는 아무런 후회나 자책도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 사이에도 불면은 계속되었지만 그 속성은 달랐다. 불안과 허망은 얕았고 단순히 순수하게 눈만 감기지 않고 저 세계로 떠나가지만 않았다. 눈 뜨고도 쉬고 꿈꾸고 편안해 했다.
배우고 싶은 게 생기면 냅다 학원 문을 열고 카드부터 들이밀었다. 과정에 대해 궁금한 것도 없었고 선생님의 실력이나 인성 따위도 사실 안 중요했다. 뭔가를 해보고 싶은 감정이 가장 중요했다. 돈과 시간과 마음을 내 의지로 소진하고 있다는 것에 매 순간 스스로 뿌듯해했다. 검색창을 켜고 배우려는 무언가에 '학원'이라는 단어만 붙여 검색했다.
그리고 검색 결과를 거리 순으로 조회한 다음 가장 가까운 곳에 찾아갔다. 내가 유일하게 궁금했던 것은 가장 빠르게 시작할 수 있는 날짜뿐이었다.
그렇게 등록한 학원에 가서는 태아의 마음으로 배웠다. 나랑 나이도 엇비슷한 선생님들을 약간 숭배하며,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절대 안 하며.
선생님이 안 보는 곳에서도 그들의 눈에 잘 보이고 싶어 하며 배웠다. 대략 20년 전, 피아노를 배울 때 연습한 횟수의 반의반만큼만 사과를 칠하던 아이에서 사과를 다 칠하고 옆에 내가 사과를 새로 그려서 더 칠하는 아이가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도 많이 만났고 주고 싶은 마음도 많이 주었다. 문득 지난날의 누군가가 그리워지면 시간이 많은 내가 알아서 움직였다. 네가 있는 곳에 맛집이 있는지, 볼거리가 있는지, 아니면 유독 먼 곳에 있는지, 날씨가 궂은지 따져보지 않았다. 언제 언제 갈게!라고 연락을 하고 다음 연락은 그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했다. 네가 기다려달라고 하면 몇 시간도 꿈쩍 않고 기다렸고, 팔 다리가 아파도 너의 편의를 위해 너를 데리러 갔다. 물론 지루하거나 아픈 티는 내지 않았다. 자부할 수 있다. 이왕이면 밥도 내가 사고 싶었고, 차를 사줄 수 있다면 더더욱 영광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편지와 선물을 갖다 바쳤다. 대상이 누구든 그 갈래는 대부분 비슷했다.
나는 너의 이런 이런 점이 좋아. 그리고 그런 점을 더 오래 볼 수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 부담 주는 건 아니고 싶어. 사실 이래도 저래도 좋아! 내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줘. 꼭!
대충 이런 식이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은 내가 어디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만큼 애절하고 간곡한 편지들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나의 행보를 보고 사람들은 짐짓 놀랐다. 왜 그만뒀니?라는 질문에는 꽤나 태연하게 '너무 오래 바깥에 서있었어요 좀 누워있고 싶어요'라고 했고, 요즘은 뭐하니?라는 질문에는 더 나른하게 '보통 누워있어요'라고 일관되게 대답했다. 왜 다음 스텝을 정해지 않느냐고 깨끗하고 시원하게 묻던 가까운 어른들도 계셨다. 아니면 알아서 잘 해오던 아이라는 믿음으로 애써 궁금해도 꾸욱 참고 있는 여러 목구멍들이 있었다. 왜 돈을 아끼지 않느냐는 물음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돈이 어디서 나느냐고 ... (돈은 나도 늘 없다 ...)
병원에서 적지 않은 인생들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나를 만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과 만났다. 그러고 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알 수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나와 이 병상에 누운 사람의 차이는 뭘까 하는 물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 한 명이 퇴원하고 한 명이 다시 입원해도 나에겐 두 명이 늘 남았다. 어렵지 않게 내가 누워있고 그 환자가 의료진이 되는 것이 상상되었다. 나는 머리가 다 빠진 채로, 무릎 밑 종아리가 다 잘린 채로, 복수가 가득 찬 채로, 정신을 잃고 섬망에 빠진 채로 어디에나 있었다.
그래서 병원을 다닐 때 에너지가 부족했다. 여러 인생으로 동시간대를 한 몸으로 살아내느라.
여러 인생을 통과하다가 진짜 내 인생만 아주 작고 옅게 남았을 때, 나는 어떤 나를 가장 보고 싶지 않을까. 혹은 보고 싶을까 생각해 보니 갑자기 시야기 뚜렷해졌다. 병원 천장에서 인생의 마지막의 마지막을 기다리게 되면, 그렇게 병원 천장의 무늬만 눈으로 세고 세고 또 세고, 그냥 이대로 죽기를 바랐다가 또 살고 싶어졌다가를 반복하게 될 때 ..
징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고, 앞으로 더 맞아도 좋을 만큼 청명한 울림이었다.
나는 재는 사람이 되기 싫고, 흔쾌한 사람이 되고 싶구나. 좋고 싫음이 정확히 반대점에 있는 희귀한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