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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Feb 17. 2023

가래떡과 아버지

#반여동


수능 끝에 아이는 별로 의욕이 없는 듯했다. 나도 확신이 없어 아이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고민했다. 두 달의 기다림과 고민 끝에 재수를 하기로 결정이 났고 나의 상황 때문에 또 기숙을 선택하게 되었다. 벌써 7년으로 접어드는 아이의 기숙생활. 코로나 덕분인지 때문인지 그래도 지난 3년은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낸 셈이다.

 

학원으로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준비물 리스트를 보고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했다. 원래 짐 싸는 건 내 전문이니까. 

물품리스트에서 사야 할 것들을 정리해 아이와 밖으로 나왔다. 계획한 동선에 맞춰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다 보니 저녁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백화점 반찬가게는 마감세일을 한다. 식품코너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 있는 떡집에서도 마감세일을 한다고 이모님이 호객을 . 떡볶이 떡이 보였다.

'아 집에 떡볶이 떡이 없지. 잘됐다.'

발길을 멈추고 떡을 골랐다. 3팩에 만원. 2개를 더 골라야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택배 박스에 물건을 정리해 넣는데 가슴 한켠이 짠하다. 고민은 그만하자. 아이를 위해서도 그건 좋지 않다.

짐이 어느 정도 싸졌을 때 한쪽에 두었던 떡을 꺼냈다. 가래떡. 나는 가래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래떡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떡이다. 소파에 앉아있던 아이에게 가래떡을 권했다.

"먹어봐. 말랑말랑해서 맛있어. 참, 꿀에 찍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집에 좋은 꿀도 있는데, 기다려봐."

꿀을 종지에 부어 아이 곁으로 와서 찍어 먹으라고 하며 나도 푹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외할아버지가 가래떡 참 좋아하셨잖아."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다. 그리고 집 앞 떡가게에서 사 왔다며 가래떡을 들고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단박에 떠올랐다.

아버지... 아버지...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내가 그나마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모든 것은 엄마를 통해 들은 얘기뿐이다. 

아버지는 6남매의 셋째,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경북이 고향인 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가 생활력이 없던 탓에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는데 그 때문에 난 할아버지를 뵌 적도 없다.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인물이 좋았고 인기도 많았다고 다. 그리고 생활력도 강해서 군에 가서도 PX에서 근무하며 제대할 때 소를 샀다던가 땅을 샀다던가... 우리 엄마하고는 큰고모의 중매로 결혼했고 가진 것이 없던 부모님은 처음에는 엄마의 외가에서 운영하던 기와공장에서 잠깐 생활했다고 다. 그리고 살아보겠다고 부산으로 넘어오셨고 그 뒤로 부산에서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나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내가 한참 큰 다음부터다. 왜 어려서의 기억이 없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7살 때 아버지가 돈 벌러 해외로 가셨는데 첫 기억이 그 언저리 같다. 가게에서 ABC과자를 사 와서 아버지가 누워있던 방바닥에 과자를 알파벳 순서대로 놓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랬다. 더럽게 왜 먹는 걸 바닥에 두냐고. 그 소리가 무서워서였는지 무안해서였는지 얼른 치우던 게 나의 첫 기억이다. 분명 말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무서운 분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단편적이다. 왜냐하면 일 년 반마다 집에 오셨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숙제처럼 '아버지전상서'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던 기억밖에 없다. 왜 그리 친근감이라고는 없는 편지를 썼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편지에는 썼지만 사실 아버지가 생각났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이 죄의식으로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부녀지간이지만 갈수록 서먹한 사이가 되었고 아버지가 휴가를 나오시면 그렇게 불편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는 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친구, 친척들, 심지어 남에게도 한없이 친절하고 베풀기도 잘했다.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의 대부분이 우리 가족에게 쓰였음에도 어린 마음에  살가운 아버지의 정을 못 느껴서 그랬는지 우리는 아버지에게 못마땅한 존재라고 생각되어 아버지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엄마의 영향도 있다. 엄마도 없는 애교를 엄마는 우리 탓을 했다. 딸을 키워도 다들 데면데면하니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


그런 생활들이 학생이 될 때까지 이어졌고 아버지가 한번 그만두고 돌아오셨지만 사기로 땅을 사고 집을 짓는 바람에 다시 다른 회사로 일자리를 잡아 해외로 나가셨다.

어릴 때 보던 아버지는 따뜻한 정은 없었지만 대단해 보였다. 아버지는 멋있었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커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에 대해서도 생각했던 것 같다.

두 번째로 갔던 회사는 대우도 정말 좋았는데 아버지를 따라 옮겨왔던 다른 사람들로 인해 아버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다. 이제 나이도 제법 드셔서 집에서 쉬시면 되는데 아버지는 그러시지 않았다.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는 어느 휴대폰 공장의 수위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근로자들이 많았다. 아버지가 그 나라 말을 잘하는 걸 알게 된 근로자들이 그들의 불편사항을 아버지에게 토로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들을 대변해 주었다. 그 덕분에 회사에서의 아버지의 역할도 커졌고 소개를 받아 다시 해외로 가시게 되었다. 70이 다 된 나이에 말이다. 아버지는 타이어 회사의 고무를 공급하는 루트를 찾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오지를 다 다니셨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고생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여러 장의 CD를 가져오셨는데 거기에는 아버지가 다닌 곳들이 다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었다. 그렇게  2,3년 지났을 때 아버지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다. 휠체어를 타고 인천공항 도착장에 들어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아버지의 다리혈관은 찌꺼기들로 꽉 차 있었고 피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제 정말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엄마가 오빠 일로 우울증을 앓고 계셨는데 나도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버지께 제안했다. 같이 사시면 어떻시냐고. 꼭 나만을 위한 제안은 아니었다. 갑자기 일을 그만두신 아버지와 오빠로 인해 우울증을 앓고 있던 엄마, 두 분 이서만 생활을 하면 두 분 다 더 나빠지실까 봐 걱정이 되었다. 같이 살면 아버지도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니기도 쉽고 엄마도 생각을 둘 다른 곳이 필요했으니까.

아버지는 내 제안을 별 고민 없이 수락하셨다. 그렇게 해서 코로나가 시작되던 2019년 말까지 우리의 생활은 8년간 이어졌고 부모님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셨다.


두 분을 모시고 올 때 나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두 분 다 만족스러운 서울 생활은 아니었겠지만 '갑'과 '을'의 관계가 있다면 나는 분명 '을'이었다. 남편에게도 그 부분을 분명히 했다.

나도 이제 직장생활을 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나만의 생각과 삶의 철학을 가진 중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릴 때 무조건 대단해 보였던 아버지는 같이 살을 부대끼며 살아보니 너무 답답한 부분이 많았다. 한국은 급변했는데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아버지가 떠났던 7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보다 더 낙후된 지역에서 생활하던 아버지는 그 변화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거리감과 어색함 때문에 멀리했던 아버지는 이제는 소통의 불통으로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못했다. 그냥 표면적인 이야기가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소외되고 있는 걸 알면서도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못된 딸이다. 어린 시절 살갑지 못했던 아버지처럼 나는 살갑지 않은 딸이었다. 남편만이 그런 나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잘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 일이 일어났다. 그즈음 아버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묻힐 곳을 정하지 못해 걱정하셨고 나서 주지 않는 자식들을 원망하셨다. 아버지에게는 늘 오빠가 1순위였는데 뭔가 필요로 하실 때는 딸들도 같이 하기를 바라셨고 챙기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들만 염두에 었다. 그런 이유로 이런저런 트러블이 생겼는데 나는 '을'의 위치였지만 언니와의 연대로 나 또한 그런 문제에 있어서 맘이 편치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나서고 싶지 않을 때였다. 언니와 형부가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위해 나섰고 너무 멀었지만 아버지가 원하던 곳이어서 아버지를 대신해 계약을 했다. 그곳은 큰집 오빠가 알아본 가족묘였고 우리 집은 세 자리를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 생신날 우리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던 아버지는 갑자기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 계약서에 네 오빠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에 네 형부이름이 들어가 있잖아. 그러면 나중에 네 오빠가 거기 묻히지 못할 텐데 빨리 바꿔야 하는데..."

계약서 서명란에 아들 이름이 아닌 사위 이름이 있는 게 싫으시다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순간 나는 참지 못했다.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큰소리로 따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냐고. 오빠는 아무것도 안 하고 할 생각도 없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데, 오빠 대신 언니네가 한 건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 있냐고. 아버지의 꽉 막힌 사고방식과 또 다른 사위 앞에서 생각 없이 말씀하시는 모습이 너무도 실망스럽고 너무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과 엄마의 만류에도 우리의 언성은 커져만 갔고 나는 아버지에게 집으로 당장 내려가시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부모님과의 생활이 그날로 딱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날 일은 아버지에게도 내게도 큰 상처로 남았을 뿐이다. 그다음 해 나는 이사가 예정되어 있었고 우린 암묵적으로 그때를 헤어지는 시기로 잡았다. 나이가 들면 다시 어린애가 된다고 하는데 이제 힘도 없어진 아버지를 상대로 나는 참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비난했다


이사 전에 부모님은 8년의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내려가셨다. 그리고 2년이 못되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지병은 있으셨으나 앓아누워계신 적이 없던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후에야 아버지가 마치 알고 계셨던 것처럼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미리 찍어 두셨던 너무 잘 나온 영정사진, 아버지가 가실 묫자리, 생명연장치료를 원치 않는다는 서... 

아버지의 모든 준비로 인해 너무 갑작스러웠던 아버지의 죽음 속에서 우리는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준비한 대로 우린 움직였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사는 동안 여행도 많이 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녔다. 주위 사람들은 나보고 부모님께 참 잘한다고 했지만 위에도 썼듯 나는 나쁜 딸이다. 아버지에게 그런 날이 올지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한 거다. 아버지가 듣고 싶으셨을 따뜻한 말 한마디를 아끼면서 말이다.


급작스럽게 악화되던 아버지를 중환자실에 두고 잠시 서울로 올 때였다. 다시 채비를 해서 내려가야 했다. 코로나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도 없었다. 서울역에 내려 집으로 가다가 중환자실 간호사에게 울며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그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차가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문 밖에서 보다 왔는데 아버지가 의식이 있다면 우리가 아무도 없어서 너무 서운하실 것 같았다.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아버지가 들으실 수도 있으니 코로나 때문에 옆에 같이 있지 못하는 거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우리가 금방 갈 거라고. 꼭 전해달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나는 아버지 꿈을 가끔 꾼다. 손주들 크는 걸 제대로 보신 적이 없는 아버지는 우리 둘째만은 전담으로 보셨다. 23개월 때부터 유모차를 끌고 어린이집을 왔다 갔다 하셨으니까. 그리고 둘째에게는 장난도 많이 치셨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가 의식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것도 우리 둘째와 나였다. 같이 살 때는 무심한 척 봤던 아버지의 웃는 얼굴. 아버지는 밝은 사람이라 늘 웃으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유독 아버지의 웃는 얼굴만 자꾸 생각난다. '맛나 떡집'에서 사 오셨다며 막 뽑았다는 가래떡을 들고 좋아하시던 아버지...


가래떡 한 줄을 다 먹고 짐을 마저 싸기 위해 일어났다.

'아버지, 모든 것이 다 감사해요. 살아야 했던 상황들이 우릴 어색하게 만든 거죠. 제가  아이를 생각하듯 아버지 맘도 그랬다는 걸, 그걸 모르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셔서 좋았어요. 이번 제사 때는 막 뽑은 가래떡 하고 꿀도 꼭 챙겨드릴게요.' 


눈이 뜨거워진다. 아이가 저 때문에 운다 할까 얼른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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