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아 Oct 20. 2022

내 입에 파수꾼을

#반여동

 “...이 말들이 막 쏟아지고 싶어서 혀끝까지 밀려왔는데 꾸욱 다시 밀어 넣게 되는 그 순간! 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거다. ‘내가 이걸 삼키다니!’ 자기한테 반하면서...”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가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못되었다.


 

꿀꿀이 울 언니


언니는 착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언니는 정말 착했다. 언니가 뭔가를 욕심내는 걸 본 적이 없다. 그 시절 언니는 과자도 싫어하고 밥만 좋아했다. 볼살이 통통했던 언니는 집에서 꿀꿀이로 불렸다. 군것질도 좋아하고 뭐든 쿵짝이 맞은 여섯 살 위 오빠와 나는 사이가 좋았지만 언니는 그 틈에 끼어 있었다. 오빠는 첫째고 잘 생긴 아들이라서 나는 막내고 밖에 나가면 다들 귀여워하는 정도라서 권리를 누렸다면 언니는 그 언저리쯤 애매한 위치였을까? 언니는 조용했고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언니는 늘 내가 놀자 하면 소꿉놀이도 해주고 친구들과 놀 때도 나를 데려나가는 걸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림도 곧잘 그려 종이인형이 부족할 때면 그려서 주고 옷도 그려 주었다. 나는 동생이었지만 언니 옷을 물려받은 기억이 없다. 엄마는 뭐든 내가 원하는 건 다 해주었지 싶다. 어릴 때 언니는 정말 특징이 없었다. 공부에서도 말이다. 그런 언니가 답답했는지 오빠는 늘 언니만 괴롭혔다. 엄마도 언니한테 많은 것을 바랐는데 엄마가 외출하고 돌아오기 전 언니가 도맡아 집을 치우곤 했다. 해외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에게 의지가 되었던 것도 첫째인 오빠가 아니고 언니였다.


그렇게 성장했고 집안 형편이 여유로웠음에도 언니는 여상을 갔다. 언니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왔을 때 의아해할 정도였다. 언니는 늘 자신을 낮게 평가했고 그런 언니가 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고등학교 고학년이 될 쯤 언니는 난데없이 디자인을 하겠다고 했는데 끝을 보지 못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끝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그 모든 것들이 둘째의 서러움이었다는 걸 알았다. 이 세상 모든 둘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언니와 나


졸업 후 언니는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고 오빠와 난 대학을 갔다. 언니가 번 돈으로 산 새 옷을 내가 먼저 입고 나가도 언니는 언제나 그러라고 했다. 덕선이와 보라 같은 자매 관계는 우리 집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커가면서 말썽 많았던 오빠 때문에 우린 늘 한편이었고 나름의 슬픔과 기쁨을 같이 공유했다. 부모님은 계셨지만 언니가 내 보호자였고 난 언니를 많이 의지했다.


그랬던 언니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형부가 될 사람은 부모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둘의 궁합을 보러 갔던 부모님은 불같이 역정을 냈다.

“글쎄, 네 사주단자를 집어던졌어! 그러며 하는 말이 이 결혼 절대 안 된다고. 부모면 이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랬다. 그렇게 자기주장이 없이 순종적이기만 하던 언니가

“이 결혼 안 시켜주면 죽을 거야! 살면서 보여주면 되잖아!”라고.


언니는 결혼을 했다, 24살 어린 나이에 처음 만난 남자 하고. 나는 형부가 그렇게 싫지도, 못나 보이지도 않았다. 처음 형부를 보던 고3일 때 형부가 내가 좋아하던 감자칩을 한 박스 가량 사다 줘서 인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방 2칸짜리에서 신혼을 시작했고 철없던 나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잘 몰랐다. 내가 대학 4학년이 되어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계획도 없던 그때 언니가 나에게 직업을 권해왔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언니 말에 용기를 내었고 취업 준비 기간 내내 언니는 나와 함께 해주었다. 처음 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을 때도 말이다.


엄마는 가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 피아노 사줄게. 면허를 따면 차를 사줄게. 서울에 면접을 보러 갈 때도 나는 호텔이라는 곳에 잘 줄 알았다. 언니가 돈에 맞춰 찾은 곳은 서울 회현동에 있는 모텔이었던 것 같다. 나는 방으로 들어서며 무서워서인지 더럽다고 느껴서인지 울음을 터트렸고 겨우 세 살 위인 언니는 나를 달래주며 방바닥 전부를 신문지로 덮어주었다. 그런 언니였고 나는 취직을 하며 서울로 떠났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점쟁이가 말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살면서 보여준다 했는데...

 

 

고난의 언니


언니로부터 죽을까 생각 중이라고 연락이 온건 아마 늦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언니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내가 곧 내려갈 테니 기다리라고 신신당부하고 형부 삐삐에 음성을 남겼다. ‘형부, 돌아오세요.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어요. 언니 생각해서 제발 돌아와 주세요.’


어릴 때의 이미지와 달리 언니는 억척같은 사람이었다. 방 2칸짜리 신혼집에서 시작한 언니는 꼼꼼하게 살림을 했고 기회가 왔을 때 다른 형제들에 비해 본인이 쓰지 못한 대학 학비를 부모님한테 내어 놓으라고 해서 받은 돈을 합쳐 번듯한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래 모든 것은 기우였어. 원래 미신 따위는 믿지 않던 언니는 살면서 보여 준다고 했던 말을 지켰다. 새 아파트로 이사한 언니는 행복해 보였고 앞으로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그랬던 언니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언니가 다니던 중소기업에서 만난 형부는 꽤 착실해 보였는데 한 순간의 실수로 회사에 피해를 입혔고 뒷감당을 못해 잠적해 버렸던 것이다. 둘째를 임신 중이었던 언니는 형부가 잠적하고야 찾아온 회사 사람들로부터 그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곧 출산을 앞두고 있던 언니였다. 그랬기 때문에 난 형부를 원망하기보다 애원했다. 지금 언니 옆으로 와 달라고.


결국 산소 호흡기를 끼고 겨우겨우 언니가 원하던 아들을 낳은 얼마 후에야 형부는 돌아왔다. 언니가 형부를 용서했고 그랬기에 우리 가족 모두 형부를 용서했다. 아파트를 팔아 모든 것을 수습하고 언니네 가족은 친정집으로 들어갔다. 돈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적어도 다른 문제에 비한다면 그렇다.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 같았던 언니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그렇게 태어난 둘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성장 발달도 느렸다. 너무나 슬프게도 그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자폐아였다. 그것도 지능발달도 되지 않는 자폐아. 1급 장애아. 그것으로 언니의 불행은 충분했다. 그 누구도 언니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다시 언니와 나

 

그렇게 들어온 친정살이가 부모님 입장이든 언니 입장이든 좋을 수는 없다. 나는 멀리 서울에 떨어져 있었고 내 소중한 언니였기에 언니가 전해 주는 말들은 너무 속상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 무렵 나도 결혼을 했기에 언니가 느꼈을 그 빈자리들을 나도 느꼈고 언니의 분노도 늘 함께였다. 어릴 때부터 거침이 없던 나는 엄마에게 무슨 말이든 했다. 그것이 특히 오빠와 연관된 것이라면 더했다. 모든 것이 불합리했고 나는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다. 언니가 억울하다면 내가 다 해결하리라. 언니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금기어다.



아프락삭스, 알에서 깨어난 언니


언니는 그 억척스러움과 용기로 다시 일어났다. 가족을 집결시키고 처해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으며 그 결과로 다시 집을 사고 독립했다. 그 외에도 언니는 많은 것이 변했다. 정말 순하디 순한 언니에서 삶의 모든 고난을 이겨낸 사람답게 언니는 예전의 언니가 아니었다. 언니는 다시 직장을 가졌고 대학을 졸업했다. 형부는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았다. 언니는 큰 조카를 명문대에 보냈고 둘째는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리고 언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주님이 언니를 구원했던가.


언니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정작 본인이 몰랐을 뿐.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언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예뻤고 스타일도 그 누구 못지않게 좋았다. 그 꿀꿀이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일까. 아님 내가 생각이 많은 나이로 가고 있기 때문일까. 언니에 대한 고마움과 연민은 사라지고 왜?라는 단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언니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볼 때는 말이다. 이제는 언니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가졌던 오빠에 대한 미움, 아버지에 대한 미움, 엄마에 대한 원망. ‘그래 그것은 내 감정이 아니었어. 그것은 언니의 마음이었던 거야.’라고 깨달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언니와 함께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언니와 나


그런 생각들이 차츰 나를 지배할 때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언니가 엄마 집 인테리어를 도맡아 했고 나는 그런 언니를 돕고 싶었다.

나는 실리주의자다. 지나치다 싶은 만큼.

언니는 감성주의자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언니는 어느 순간 나에게 말했었다.


“나는 네 얘기를 듣고 한없이 네 편이 되어 주는데 너는 왜 그러지 않는 거야? 그냥 내 얘기를 듣고 내 말이 옳다고 내 편이 되어 욕해주면 되는데 너는 꼭 분석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해결하려고 하고! 내가 네게 바랐던 건 그냥 들어주는 거라고! 해결하는 게 아니고!! “


그랬었나... 내가 그랬었나? 나는 그 얘기를 들은 후론 더 조심했다. 내 마음속에 꿈틀대던 그 ‘왜?’를 감추고 말이다.


그랬는데 그때 터지고 말았다. 언니와 인테리어 문제와 여러 문제로 대화를 나눈 날. 난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했다. 목까지 밀려온 말들을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늘 새벽기도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언니를 아는 터라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해서 말을 하고 말았다. 그날의 일이 아니다. 언니가 변했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의 나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내 얘기의 끝은 이거였다.


“언니면 언니답게 하란 말이야!”


그 얘기를 듣고 언니는 울었던 것 같다. 아마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다.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는 거라고...

그래 언니는 변한 게 아니었다.

속 시원히 내 할 말을 했다고 느꼈지만 나도 그럴 일 없다. 그날 그 상태로 필라테스를 갔던 나는 기구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

‘그래 벌 받은 거지...’

말이 칼이 되어 언니에게 꽂혔을 때 나도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날 이후로 다짐했다. 칼이 되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그래서 언니와의 전화연락을 끊었다. 인연을 끊겠다는 것이 아니다. 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 시간은 흐르고 있다.


말이 더 이상 칼이 되지 않고 방패가 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말이 다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때,

나는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해방일지>의 창희처럼 어른이 되는 그 순간이 될 때를 나는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홈, 스위트 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