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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Oct 20. 2022

홈, 스위트 홈!

#반여동

“위이잉~,위이잉~”

휴대폰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식탁 위를 미끄러진다. 화면 표시창에 ‘2층 세입자 장세희’라는 글씨를 보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오늘 수요일이지.

전화를 받지 않고 진동이 멈출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진동이 멈춘 후 곧바로 ‘웅웅’ 문자 알림음이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두통이 밀려오는 듯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인집 딸이었다. 들은 얘기론 내가 태어나기 전 오빠와 언니만 있을 때 세 들어 살던 우리 가족은 주인집 자식한테 괄시받던 오빠를 보고 아버지가 그 길로 나가 산동네 비슷한 곳에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두 분 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 없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셨지만 생활력이 강했던 아버지는 어떻게든 자식을 남한테 뒤지지 않게 키우려고 애쓰셨다. 그렇게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났고 태어날 때부터 내 집이 있었으며 단층짜리 우리 집엔 작은방에 세 들어 살던 사람도 있었다.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아버지는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셨는데 외국에 있는 회사에 가게 되셨다. 그래서 갑자기 우리 집은 달러를 버는 집이 되었다.

그 동네엔 골목길에 평상이 놓여 있었고 거기서 동네 아줌마들은 늘 부업을 했다. 물론 우리 엄마도 함께였다. 밤 까기, 수놓기, 낚시 바늘 꿰기 등.

학교에 입학하고 백 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바람처럼 달려 골목으로 들어서면 아줌마들 속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엄마의 얼굴이 나를 맞이하곤 했다. 날 때부터 주인집 딸이라서 그랬는지 아버지가 한 번씩 사다 주시는 외제 물건 때문이었는지 나는 구김도 없었고 뭐든 갖고 싶은 것을 요구했으며 그리고 엄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와 엄마의 헌신으로 우리가 그 동네를 벗어나 좀 더 아랫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우리를 부러워하며 배웅하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과 말들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이사한 집은 2층 집이었다. 그 집을 판 사람은 선생님이었는데 우연히도 그분이 나의 4학년 담임이 되셨다. 나는 4학년 때 유달리 상을 많이 받았다. 거의 매주 월요일마다 받다 보니 안주실 때는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사하고 엄마가 집을 속고 샀다고 말씀하시는 걸 자주 들었는데 내 상장의 이유가 그것은 아니겠지? 아무튼 나는 그 집이 싫지 않았다. 그 뒤에 우린 다시 다른 동네 2층짜리 빨간 벽돌집으로 이사했다. 난 늘 주인집 딸이었고 우리 집엔 갈수록 세 사는 사람들이 늘었다. 친구들보다 항상 여유로웠고 그게 당연한 듯 여겨졌다.


그랬던 내가, 거침없었던 내가, 중학교에 가서 만나게 된 친구들로 인해 처음으로 주눅이 들었다. 나는 키가 큰 편이었고 어릴 때부터 어른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이쁨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만나 사총사가 된 친구들 중에선 내가 키가 제일 작았다. 친구들은 다 잘 살았고 부모들도 형제들도 다 멋졌다. 내겐 그랬다. 그리고 한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나는 그 집에 압도당했다.

그래 정말 압도당하고 말았다.

친구 집은 굉장히 넓었고 너무나 잘 꾸며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그 애는 멋들어지게 피아노를 쳤다. 아버지가 중소기업을 하던 그 친구는 얼굴도 예뻤고 공부도 아주 잘했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당연히 그 애를 좋아했다. 그때 사춘기가 시작되어선지 뭔지 나는 자격지심이라는 걸 갖게 됐고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사춘기를 겪으며 성장할 동안 우리 집은 순탄한 생활을 끝내고 약간 옆으로 비켜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아버지가 부동산 업자에게 속임을 당해 엄청 비싼 값에 외곽에 있는 땅을 사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욕심 많고 형제애라고는 없는 작은 아버지의 꼬임에 빠져 아버지가 허허벌판인 그 땅에 집을 짓기로 한 것이었다. 그 당시 집장사에 재미를 본 작은 아버지는 일거리가 없자 아버지를 이용했다. 그때도 해외에 있던 아버지는 엄마 말보다는 작은 아버지 말을 더 신뢰했다. 아파트로 집을 옮기며 재산을 늘려 가려던 엄마의 계획은 틀어졌고 집을 짓기 위해 은행에서 돈까지 빌렸다. 그러면서 나는 처음으로 남의 집에 세를 살게 되었다.


철없던 나는 집이 완공되었을 때 좋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와 아버지는 그 집 때문에 30년 가까이 고생했다. 집은 계획성 없이 날림으로 지어져 겨울엔 너무 춥고 여름엔 쪄 죽을 듯이 더웠다. 공사비를 빨리 빼기 위해 가게 세입자부터 들인 작은 아버지는 그 사람과 쿵짝이 되어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1,2층을 한정식 집으로 구조를 바꿨고 그렇게 그 집은 실용성 하고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 사람이 유일한 세입자였는데 그렇게 들인 그 사람은 15년을 세 들어 살며 남들한테 집주인행세까지 하다가 결국은 재판까지 하고서야 내 보낼 정도로 부모님을 괴롭혔다.

그 이유만으로도 작은 아버지를 원망할 이유는 충분했는데 나중에 작은 아버지 본인 집은 돼지 삼 형제 막내의 벽돌집처럼 굳건히 지은 걸 보고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님의 재산 증식도 그 집과 함께 끝나 버렸다. 그렇게 집은 스위트 홈에서 내 사춘기와 함께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취직을 하고 서울로 올 때 그 집을 벗어나서 좋을 정도였다.


서울로 오니 한층 더 내가 알던 세상은 세상이 아니었다. 서울역에 처음 내려서 본 대우빌딩은 한 번에 서울이 어떤 곳인지 알려 주는 듯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데이트를 하며 차로 한강변을 달릴 때면 그 아름다움에 빠져 여기에 내 집이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면 행복하겠지 하고 말이다.


그 뒤로 얼마 안 되어 IMF를 겪고, 서울 생활이 만만하지 않음을 배우며 렇게 저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몇 번의 이사를 했다. 그동안에도 부모님은 그 집과 씨름을 하며 지내셨고 나는 거기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 살기도 너무 바빴다. 서울의 집값은 한없이 올랐고 나는 계속 타이밍을 놓쳤고 다른 이들에 비해 뒤처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불안해하다가 최종적으로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왔을 때 그건 기쁨이 아니었다. 안도감이었다.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람의 심리는.

이제는 도로변에 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다.

‘서울에는 참 건물이 많구나. 저 건물마다 주인이 있겠지?’

어느새 집이 아닌 건물주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여러 가지 일로 너무 힘들었을 때 누가 철학원을 권해줘서 간 적이 있다. 그분이 얘기 끝에 5년 뒤에 직장을 그만두고 임대업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웃으며 “선생님, 저에게는 임대할 건물이 없는데요.” 하니 그게 내 사주에 있다는 다. 그 말이 나중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러 가지를 정리해야만 했다. 우리 삼 형제가 공통으로 바랐던 건 엄마를 그 집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리는 거였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엄마에게 그 집은 밥을 해 먹고사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이제 엄마 혼자는 그 집을 관리하기도 그 집에 기도 힘들다.

우리는 집을 어떻게 할지 모여서 의논했다. 정말 팔아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운 집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정리하기를 바랐던 집인데 막상 아버지가 가시니 우리도 그 집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 집이 곧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집을 사랑하셨다. 단 한 번도 작은 아버지를 원망하 않았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작은 아버지를 미워할 때도 묵묵히 듣기만 할 뿐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긴 고민 끝에 내가 그 집을 맡기로 했다. 아마 그 철학원 선생님의 말 때문에 운명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편히 사시게 그 집 값만큼 드리고 이제 모든 관리는 내가 하리라...


가족 모두 동의했고 시세를 알아보러 부동산을 다닐 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만큼이나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이 있었다. 집의 값어치가 우리 생각보다 너무 낮았던 다. 아버지는 평생을 열심히 사셨다. 그런데 돌아가시니 눈에 보이는 금액으로 그 평생이 평가되는 기분이었고 그리고 그 평가가 살아온 날 들에 비해 너무 박해서 슬펐다. 내 입장에서는 높아도 걱정이지만 낮아도 싫은 거였다.


해외로 다시 나가야 하는 오빠의 빠듯한 일정에 맞춰 우린 모든 것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나는 작고 낡디 낡은 건물의 건물주가 되었다. 은행 대출금과 함께 말이다. 몇 안 되는 세입자들에게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리고 엄마는 젊어서부터 살고 싶어 하던 아파트로 이사했다.


나는 그 뒤로 세입자들로부터 이런저런 전화를 받는다. 윗집이 시끄럽다. 물세가 많이 나온다. 물이 샌다. 그런데 특히 수요일만 되면 2층 세입자에게서 연락이 온다. 부모님은 작은 건물을 손수 관리하셨는데 나는 서울에 있기 때문에 내가 맡은 순간 당연히 청소용역업체에 맡겼다. 하지만 사람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챙겨보지 않으면 대충이 자리 잡는다. 2층 분께서는 그게 속상한지 매번 나에게 이르는 다. 처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애써 보았고 그분이 고마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전화는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장문의 고발 문자가 와있다. 수요일은 청소업체가 다녀가는 날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특히 타인과 비교하는 순간 행불행은 시작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행복하기도 했고 불행하기도 했다. 결혼 후에는 나에게 서울에 집이 생기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다. 나에게 건물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부러워할 것이고 나는 누군가를 보고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이 집에서 행복한가?

집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집은 집이다. 하지만 그 집을 두고도 누구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행복하지 않다. 집 자체에서만 행복을 찾으려면 그런 것 같다. 하지만 행복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다는 걸 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집이 스위트 홈이 될 수 있도록, 아버지의 낡고 낡은 작은 건물이 멋진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나는 희망을 가져본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용역업체를 바꿔야겠다.

그리고 다음엔 아버지 집에 가 봐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두려워 말고 해야지...



집에 대한 단상


다음은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극 중 사업가 고모할머니와 가난한 경리 조카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나눈 대화다.
“자본주의는 심리게임이거든. 있는 사람은 극복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못하는 감정이 있어.”
 "그게 뭔데요?”
“상실감!
잃을 수 있어야만 큰돈을 만질 수 있어. 더 많이 리스크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 난 말이야 모든 걸 잃어도 이런 집만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날 보호해 주는 보호자가 생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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