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돌아가신 시할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셨다. 난 둘째를 낳고 얼마 안 됐을 때 그분께 자발적으로 카톨릭 신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었다. 할머니는 무척 기뻐하셨고 나에게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 테니 좀 여유가 생기면 공부해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천천히 해도 된다는 그 말씀을 방패 삼아 난 지금도 종교가 없이 지내고 있다. 하지만 내 가슴속엔 할머니와의 약속이 남아있고 내가 가야 할 곳이 그곳이라는 생각도 변함없이 가지고 있다.
얼마 전 로마 비행을 앞두고 같이 갈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배님, 우리 이번에 바티칸 가지 않을래요?"
그 말에 작년에 엄마와 같이 간 바티칸이 떠올랐다. 그날 가이드 선생님의 열정적인 설명 덕분에 정신없이 투어를 따라가던 나는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가 그려진 방에서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었다. 마스크를 쓴 데다가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날을 떠올리며 두 번은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이미 갔다 왔어요."
"저도 갔다 왔어요. 선배님, 혹시 희년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그 말을 들으니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올해가 희년이라 로마비행은 늘 만석일 거라는 얘기였다.
"희년은 50년마다 오는데 희년에 바티칸 성문을 통과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대요. 저는 지은 죄가 많아서 용서받으러 가려고요. 하하!"
"그래요? 나도 죄지은 게 많은데. 그럼 같이 가요."
"정말요? 그럼 제가 예약해 놀게요. 그때 봬요~"
그러고는 휴대폰을 들어 희년에 대해 찾아봤다.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레위기
50년이라... 다음 50년이면 나는 백세가 넘기 때문에 살아있을 가능성이 적다. 잘됐다. 누군가에게는 이 희년에 바티칸을 방문하는 일이 평생의 숙원 사업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운명론자라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갑자기 가게 되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계획을 가지고 로마로 갔다.
약속한 날 만난 가이드는 나이가 좀 있으신 여자분이셨다. 지난번의 열정적인 가이드분에 비해 기운이 없어 보였고 선입견 때문인지 설명도 부족하게 느껴지고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분을 따라 입장을 하고 얼마 안 되어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나는 오늘 성문만 통과하면 돼.' 그랬다. 설명이 부족해도 아무 상관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가이드분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내가 제일 열심히 그분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따른다. 처음에는 대충 하는 것 같아 보이던 그분의 설명도 삶의 연륜에서 나온 여유였을 뿐이었다. 사람들도 생각보다 적었다. 걱정했던 천지창조가 그려진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갔을 때도 그리 답답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고 천천히 최후의 심판과 천장화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살짝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가이드 선생님이 미소 지은 얼굴로 말없이 나에게 앉아서 볼 수 있는 자리를 알려 주고는 사라지셨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것도 일방적으로는 되는 것은 없다. 난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그 자리에 앉아 지난번과는 다른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감상했다.
그 방을 빠져나와 성베드로 성당으로 향했다. 이제 내 목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마지막에 가이드 선생님이 희년에만 열리는 성문을 알려 주셨다. 그리고 희년은 이제 25년마다 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 한들 다음 25년 후에 내가 여기 있을 수 있을까.
성문 앞에 가까이 갔을 때 난 정말 진심이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나의 모든 욕심을 거둬 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누구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문을 통과하고 피에타 조각상 앞에 섰을 때 눈물이 나고야 말았다. 나는 내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두었다. 맘 같아선 몇 시간이고 그 앞에서 울고 싶었다. 그렇게 내 목적을 이루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교회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잘못을 하지 말아야지. 잘못해 놓고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날 성문을 통과하고 난 후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또는 종교의 필요에 의해 50년 주기가 25년이 되든 더 짧아지든 상관없다. 인간에게는 이런 의식이 필요하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너무나 나약해서 쉽게 죄를 저지르고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의 다음 오십 년을 희망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조금이라도 죄를 짓지 않기를,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고, 미워하지 않기를 말이다. 그리고 내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