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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Oct 24. 2022

돼지엄마

#아직 끝나지 않은 그리고 끝나지 않을 나의 육아 이야기

나는 돼지엄마가 아니다. 여러 엄마들이 나를 돼지엄마로 알고 다가왔다가 얻을 것이 없는 속 빈 강정인걸 알고 돌아섰다. 아님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벽을 쌓았는지도 모른다.


아이


결혼에 대한 생각도 아이에 대한 생각도 깊이 해보지 않던 나는 긴 연애 끝에 당연한 듯 결혼했고 2년 뒤에 아이를 낳았다. 첫째가 태어나기 전 내 주위엔 아픈 아이들이 많았다. 조카는 자폐아였고, 사촌오빠 아이는 한쪽 눈이 거의 실명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약하게 태어났으며 내 친구 아들은 다섯 살 무렵인가 안(眼) 암 판정을 받아 한쪽 눈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런 일들이 있다 보니 아이를 낳는다는 건 한편으론 너무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지기 전부터 가진 후로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에 몸에 안 좋은 것들은 삼갔고 아이 태명도 건강이라 짓고 오직 건강하기만을 바랬다. 임신기간 내내 태교에 좋은 것은 다했다.


출생


그 덕분인지 정말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날 그 개인병원에서 출산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간호사들이 번갈아가며 들어와 엄청 우량아를 낳았다고 “아이가 당장 학교에 입학해도 되겠어요!”라며 나를 놀리는 건지 축하하는 건지 모를 말들을 했다.

조리원에서 안도의 2주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아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몰라 울었던 나도 어느새 적응해 편안해졌을 때 잠자는 아이를 들여다보며 ‘너무 건강하기만 바랬나? 기왕이면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기를 바랄걸.’ 하고는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건강하면 다 다 생각해 놓고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를 확인하니 또 다른 것들을 바라는 것이다. 참 사람의 욕심이란.


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이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 낳는다면 어떻게 키울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연애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혼처럼 아이도 자연스럽게 가진 거지 계획이란 건 애초부터 없었다. 아이가 커 가면서 나도 내 나름의 기준을 세워야 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봤을 때 공부란 건 본인이 필요로 할 때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공부로 아이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지. 늘 따뜻하게 대해 줘야지. 이 세상에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언제든 아이 편에 서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대화가 되는 엄마가 되어야지. 이게 내가 세운 육아의 기준이었다. 얼마나 이상적인가.

그렇게 건강하게 크기를 바랐던 아이는 쑥쑥 컸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좋은 것은 다 해 주었다. 그런데 나의 무지함은 아이가 교육을 받게 되는 순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치원


우리 아이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애기 일 때는 문화센터를 다니며 글렌도만 영재교육, 가베 같은 것을 배웠고 아이에게 필요하다는 비싼 전집도 조리원에서 만난 엄마들을 따라 열심히 샀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야 할 시점쯤에 놀이학교라는 곳이 유행했다. 그래도 아이를 생각한다는 부모들이 찾던 그곳은 조기 교육보다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해 주는 곳이라는 믿음에 인기가 많았다. 따지고 보면 거기도 또 다른 이름의 조기 교육장이었을 뿐이다. 그 후에 예기치 못한 층간소음 문제로 나는 도피 같은 이사를 해야 했는데 낯선 곳으로 가다 보니 아이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수소문해서 몇 군 데 찾아보다 정한 곳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하얀 건물’이 있는 유치원이었다.

영어 유치원.

내 문제는 이거다. 영어를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좋아서 영어에 뜻을 두지 않고 영어 유치원을 보낸 것.

시발점이 달랐기 때문에 나는 아이만 행복하면 된다는 무책임 아래 영어 유치원에서의 생활을 따라가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독서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가정방문으로 진행되던 독서 수업은 수업 전에 엄마가 그 주의 책을 적어도 세 번 읽어주어야 했다. 그렇게 규칙을 말한 선생님에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이 수업을 하는 목적은 아이가 책을 꾸준히 접하고 책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먼저 읽어주면 수업이 기다려지지 않을 것 같아요. 커리큘럼을 안 따라가도 되니 매주 오셔서 책 한 권 재밌게 읽어주고 가주세요.”

좀 더 커서 그룹 논술 수업을 제시받았을 때도

“아직 책도 많이 안 읽은 애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게 의미가 있나요? 그냥 지금처럼 할게요.”


초등학교


층간소음으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아랫집이 이사 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동네에선 마음이 놓였다. 첫아이라 경험이 없던 내게 조언해 줄 사람들이 그 동네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 유치원을 졸업했으나 영어를 못했던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영어학원을 다니며 학원 전기세와 셔틀비를 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속상했지만 아이가 힘든 건  원치 않았던 나는 작은 규모의 학원으로 옮기며 선생님께 부탁했다.

“힘들어서 옮긴 아이니 숙제도 적당히 내주시고 영어를 싫어하지 않게만 해주세요.”

아이가 조금 더 컸을 때 많은 아이들이 목동으로 학원을 다녔다. 직장을 다녀 매일 학원 픽업을 해줄 수 없었던 나는 초등학생이 혼자 전철을 타고 목동까지 가야 하나 생각하니 아이가 안쓰러워 보내지 못했다. 누가 그랬다. 지금 안쓰러워하면 나중엔 아이가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중학교


중학교를 보내야 할 시기가 왔을 때 우연히 기숙학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남편은 좋은 환경에서 아이가 성장하기를 바랐고 나는 아이만 생각했다. 휴대폰이 없던 아이는 그 학교에 가면 휴대폰을 사준다는 아빠의 말에 그 학교로 진학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남편 말도 이해가 갔지만 그 어린 나이에 기숙사에서 지내게 될 아이를 생각하니 쉽게 결정할 순 없었다. 그 당시 친정 부모님이 아직 어린 둘째와 큰 아이를 돌봐 주고 계셨는데 곧 사춘기가 시작될 아이를 생각하니 나름 기숙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남편은 지방에 있었고 나는 근무가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기숙사에서 규율 속에 성장한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그리고 늙으신 부모님도 조금은 편해지시겠지. 더군다나 회사에서 일부를 지원해 주니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안 돼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정말 운 좋게 아이는 합격을 했다. 입시 문제로 항상 시끄러운 세상이라 몇 년 전부터 입학시험은 없어졌으며 자소서에는 모든 수상 기록이나 부모의 배경을 못 쓰게 되어 있었다. 면접도 블라인드 평가로 진행되었다. 우리 아이 같이 평범하고 내세울 게 없는 아이도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비소집일 날 교장 선생님의 넋두리가 생각난다. 그 바람에 우수한 아이를 선별해서 뽑을 수 없어 힘들다고. 나 혼자 뜨끔 했던가.


우리 아이는 준비 없이 그런 학교에 갔다. 유치원을 고를 때처럼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다. 그냥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학교에 들어가고 보니 그 학교는 정말 대단한 학교였다. 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강남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준비반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아이를 그런 좋은 학교에 보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던 나는 너무 무식한 엄마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엄마들의 차로, 학원의 차로 대치동으로 직행했다. 아이가 힘들까 봐 목동으로도 못 보내던 나는 당연히 그런 건 꿈도 못 꿨다. 대신에 과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은 따라가야 했다.

한창 성장기에 접어든 아이는 주말에 집에 오면 병든 닭처럼 꼬꾸라졌다. 그게 안쓰러워 과외 숙제를 못해도 수업 중에 잔다고 과외선생님이 일러도 나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학교를 보낸 건 우리의 결정이었지 13살 아이의 결정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꼴찌여도 좋으니 학교에서 즐겁게 생활하기를 바랐다.

돈도 많이 들었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여유가 없는 생활을 했다.

그 학교에 보냈을 때 많은 돼지엄마들을 봤다. 그들과 친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보를 얻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좋은 학원을 알아도 대치동으로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고 좋은 과외 선생을 안다 해도 비싼 수업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반대로 아무 정보력도 없는 나를 그 엄마들이 찾을 리도 만무했다. 서로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는 스스로 왕따가 되었다. 내가 나서지 않으니 아이도 어디에서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가? 나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아이는 내 바람대로 학교생활에 큰 불만을 못 느끼고 만족해하며 졸업했다. 반면에 아이는 그 3년 동안 오히려 기초학력을 쌓을 기회마저 놓쳤다. 아이를 위한다고 했던 일들이 점점 아이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고등학교


중학교의 힘으로 아이는 고등학교를 잘 갔다.

고등학교를 수월히 가는 걸 보고 아이는 자존감이 좀 올라간 것 같았다. 아이보다 아이를 더 잘 알고 있던 나는 아이가 고등학교에서 받을 충격과 상처를 걱정하면서도 아이가 욕심을 가지고 지금부터라도 잘해나가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한동안 아이는 열심히 했다. 나도 코로나로 회사를 쉬는 중이었기 때문에 새벽 1시고, 2시고 아이를 픽업했다. 중학교 때의 기억으로 아이에게 목동이나 대치동을 권했으나 머리가 굵어진 아이는 단호하게 안 가겠다고 했다. 나는 아이의 의견에 따랐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아이의 의견을 따른 건 내 마음이 편하자고 그랬던 거다. 지금까지 내 모든 행동들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하자고 했던 행동이었다.

‘나는 물어봤어. 아이가 원한 거야.’라고 나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얼마 못되어 아이는 힘들다고 했다.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나는 아이에게 화를 잘 못 낸다. 특히 공부에 있어서는. 나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DNA를 믿는 사람이라 우리 부부에겐 그런 DNA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못하는 걸 아이에게 요구할 순 없었다.

대학을 가는 방법은 수십, 수백, 수천 가지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 걸 알아볼 엄두가 안 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입시 설명회를 가도 너무 어렵기만 했다. 휴직 중이라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나에겐 그런 DNA가 없다. 그래서 또 아이에게 미안했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나 스스로 열심히 도전해서 자격증을 따는 거였다. 뭐든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고 말이다. 그리고 열심히 지극정성으로 밥을 챙겼다.

내가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동안 아이의 출신 학교 때문에 내가 정보 많은 돼지엄마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여러 엄마들이 다가왔다. 나는 항상 솔직하게 말했지만 상대방은 내가 정보를 주기 싫어 그런다는 오해를 했다. 혹은 정말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걸 알고는 멀어졌다.


입시


아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TV에 나오는 드라마나 성공적인 육아 스토리가 내 이야기이길 바랐다.

‘꼴찌를 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공부를 시작하더니 전교 일등을 하더라고요.’ 같은.

그런데 그런 스토리는 내 주위에서만 일어났다. 심지어 이사 온 앞집 아이도 서울대생이다. 아이가 실망스러운 말을 전해 줄 때마다 괜찮아하고 말하면서도 아이는 부모의 속마음을 잘 느낀다고 하는데 내 마음이 들킨 게 아닐까? 내가 정말로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내 탓을 또 하다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처음의 마음을 상기하곤 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아이를 위한 마음이었나? 그 또한 나를 위한 마음이었던 건 아닐까.

나는 좋은 엄마인가 나쁜 엄마인가?

나는 능력 있는 엄마인가 무능한 엄마인가?

나 나름으로 세운 기준들이 아이의 삶을 바꿔 놓은 건 아닐까?

자식을 키우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기준을 세우기가 너무 어렵다. 내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수능이 한 달 남았다. 아이는 자기가 갈 곳이 없어 걱정한다. 그렇게 걱정을 하다가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면 금방 철없는 어린아이가 된다.


내가 고3이던 초여름, 내 인생엔 큰 변화가 있었다. 체육시간이었고 우린 줄을 서서 뜀틀을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날 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체육교사였던 담임은 내가 날렵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체육부장을 시켰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던 나는 나가서 체조 시범을 보이라는 선생님 말씀에 나섰다가 무안을 당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나 자신을 체육을 못하는 아이로 정했고 체육시간은 내게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그날 무슨 이유인지 처음으로 그 뜀틀을 뛰어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맨날 뜀틀 한가운데 무겁게 걸터앉곤 했는데 말이다.

뜀틀 몇 초 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마음을 먹었고 정말 깃털같이 가볍게 그 뜀틀을 뛰어넘었다. 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가 밀려왔다. 마음을 먹으면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나 글이 아닌 내 온몸으로 체득하고 보니 그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후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산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필요로 할 때면 그 뜀틀을 생각하며 뭐든 그걸 해냈다. 지금 내 삶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적인 삶은 아니더라도 그 깨달음 덕분에 나는 능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아이.

지금 얼마 안 남은 수능을 앞두고 고민이 많을 내 아이. 그 아이도 언젠가 자기만의 뜀틀을 만나고 그것을 뛰어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롯이 자기가 느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내 아이에게도 살아가는 동안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도 아이를 데려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신나게 얘기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따라 부른다.

지금 잘 못하면 어떤가. 열여덟 나도 그랬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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