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 앞에 서서 밀린 점심 설거지하다 말고 뒤돌아섰다. 둘째 아이가 엉덩이를 쥐어 잡고는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주방으로 쫓아왔다.
“어서 화장실 가.”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 안 돼!”
“안된다니? 뭐가?”
“방금 아파트 방송에서 화장실 쓰지 말라고 했잖아. 엄마는 못 들었어?”
“뭐 어? 화장실을 못써? 엄마 설거지 중이라 잘….”
나는 기가 막혀 말문까지 막혔다.
“그래도 쌀 건 싸야지. 화장실 두고 옷에 쌀 순 없잖니. 그렇다고 태풍까지 오는 날에 어딜 나가서 싸겠니?”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아이를 나무란 뒤, 얼른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아파트 단톡방에 들어갔다.
아파트 단톡방에는 새로운 알림이 60개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일까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휴대전화 화면을 터치했다. 벌써 입주민들 사이에서는 웃지 못할 화장실 해프닝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화장실 참기 사건’의 내막인즉슨 태풍으로 인해 비가 집중적으로 많이 왔고, 그로 인해 아파트 오수 시스템이 고장 나서 저류조가 넘쳤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긴급 복구 작업을 하고 있으니 세대 내 화장실 이용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보완대책을 강구하는 중이라며 입주민 대표 위원이 안내 메시지를 올렸다.
전날 뉴스에는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할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태풍의 경로를 예측한 결과 한반도 특히, 대구까지 세력을 유지해서 북상할 것이라고 했다. 이례적이라는 이 소식은 대구시민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야말로 대구는 초비상이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물론 학교 초등 돌봄까지 휴원을 공지했고, 이미 개학해서 등교 중이었던 고등학교 역시 임시 휴교를 선언했다. 종일 안전 안내 알림이 계속해서 울렸고,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몇몇 학원에서도 뒤늦게 긴급 휴원 문자를 보내왔다.
태풍이 대구에 도착 날,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던 이른 아침과 달리 점심때가 되자 우박을 쏟는 듯 빗줄기가 요란하고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수목들이 좌우로 세차게 흔들리고 주방 창문 너머 보이는 금호강 물줄기는 토를 하듯 흙탕물을 뿜어냈다. 한 시간여 동안 ‘카눈’은 제대로 존재감을 알린 뒤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높아지더니 구름 사이로 해가 방긋 나타났다.
하지만 태풍은 태풍. 카눈은 그냥 가지 않았다. ‘살다 살다 우리 집 화장실을 건드릴 줄이야.’
아파트 단톡방에는 처음 보는 광경의 사진들이 올라왔다. 그것은 관리실 직원은 물론 119 대원까지 긴급 출동하여 늦은 시간까지 저류조 배관 복구 작업에 힘쓰는 모습이었다.
저녁이 되어 온 가족이 모일 때까지 화장실 이용자제 방송이 계속해서 나왔다. 우리 가족은 작은 변은 모아서 한 번에 물 내리기, 큰 변은 조금 참았다가 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변기에 물을 내리는 순간 용변들이 다시 튀어 오르면 어쩌냐며 깔깔거리다가도, 화장실 가기를 미루며 걱정을 늘어놓았다.
1500세대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에 아무리 비가 많이 왔기로서니 저류조가 넘치는 오수 시스템이라니,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기엔 뭔가 찝찝하다. 마음 놓고 싸는 일이 이렇게 소중한 일일줄이야. 더 큰 어려움이 생기지 않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순간 계속해서 볼일을 미룰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찔하다.
세상 곳곳 별일이 많은 요즘,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라는 속담이 스친다. 정말이지 그런 일은 영영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은 하루빨리 저류조가 원상 복구되길 바랄 뿐.
오늘은 우리 집에 태풍이 지나간 날, 카눈이 휩쓸고 간 자리, 웃지 못할 그리고 웃기는, 마음대로 똥도 못 싼 어마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