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 날, 내 아이는 장난감을 사달라며 쇼핑몰 한복판에 엎드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보통의 부모, 비장애인의 부모라면 둘러업고 일단 자리를 벗어나려 하겠지만, 휠체어 탄 엄마인 나는 그럴 수 없다.
주변의 도움을 받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 먼저 가는 척을 한다. 이 것도 아이가 따라오지 않을 경우 시간이 약이겠거니 바닥을 헤엄치는 아이 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말이 쉽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이를 공공장소에 내버려 둔다는 건 가시방석에 있는 것보다 더한 불편함을 초래한다.
무력으로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으니, 나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끝없이 설득의 기술을 쓴다.
“오늘은 장난감 사는 거 아니야.” 라든가 “과자 하나만 사서 나올 거야.”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마트를 가며 수 십 번은 아이에게 말한다. 야무진 대답을 여러 번 듣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은, 신기하게도 장난감에 눈 길도 주지 않고 과자코너에서 딱 하나를 골라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나눠 먹을 거라며 , 여럿 낱개로 포장되어 있는 빵(일본어로 써져 있는)을 꼭 쥐어 나에게 내민다.
기특해 하나 더 골 라보라 해도 작은 손가락 중 하나를 내밀며 “하나.”라고 말한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기쁜 일도 많지만 버거울 때가 더욱더 많다.
아이를 아침에 깨워 밥 한수저라도 먹이고 씻기고 옷 입히고, 저녁에 아이 하원, 요즘 따라 안 먹으려 하는 밥 먹이고 또 재우고
단순한 이 일들이 나에게 점점 버거워진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면 이 아이가 나에게 온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혼을 하고 간혹 들었던 말이 있다.
“돌이킬 수 있다면, 아이 낳을 거야?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사실 이미 머릿속으론 대답을 끝냈지만, 입 밖으로 뱉는 나 자신이 스스로 혐오스러울 까봐 꾹 눌러 삼킨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장애인인 몸으로, 아빠 없이,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게 무섭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이의 가치관의 방향은 달라질 것이고, 내가 주는 음식에 아이의 체형이 결정될 것이고, 내가 보내는 학교에 따라 아이의 사회화가 따라올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것들을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 돼버리니, 무서웠다.
아이를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책임감 혹은 죄책감은 그 배로 따라와 내 마음을 짓 눌렀다.
“후회” 란 인간만 할 수 있는 가장 아둔한 짓.
이라고 생각한 다. 돌이키고 싶은 그날로 돌아간다 할지언정 선택을 바꿀 수 있을까?
알면서도 나는 후회하고, 후회한다.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하고, 기회가 있을 때 이별하지 않은 것에 후회하고, 아이를 가지려고 한 선택에 후회하고, 외도 사실을 알고 감정적으로 굴었던 나를 후회한다.
좀 더 의연했다면, 그의 외도에 내가 초연했다면.
아이의 아빠를 잃지 않게 해 줬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