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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승철 Jan 05. 2023

<서평>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

- 교육의 본질 -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 - 이병곤(서해문집)


벌써 십여 년이 흘러버린 기억에 '간디 학교 교가'에 감동하여 강연 자료로도 활용한 적이 있다. 그동안 간디 학교에 대한 다양한 책이 있었을 텐데 지금에야 관련 책을 집어 들었다. 게으른 탓이다. 2022년 10월에 나온 이 교육에세이 저자는 제천간디학교 교장으로, 2020년 7월부터 4주에 한 번씩 한겨레신문에 '세상 읽기'에 연재한 칼럼을 모았다. 교육에 대한 올바른 철학을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이런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온통 교육이 아닌 '교화'(敎化, indoctination, 저자는 이 단어를 부정적인 뜻으로 '주입' 정도로 보는 것 같다. 저자의 해석은 '학습자의 자유를 빼앗고 교육만 취하는 행위'다.)에 둘러싸여 있는 까닭이다. 


1990년대에 출발한 한국의 대안교육에 위기가 찾아온 모양이다. 자발적 '비주류'를 선택한 학생과 학부모가 줄고 있다니 말이다. 인간 역량과 자질의 대부분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교육이 보험과 다른 이유는 어려운 일을 맞대면함으로써 존재 자체가 새로운 단계로 고양하도록 부추기는 과업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개별자'로 만드는 교육은 오늘날 여러 대안학교에서 그나마 숙고하여 실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학교들은 학부모와 연합하여 '입시'에만 목을 매고 있으니까. 제천간디학교는 학생 105명에 교사 20여 명이 함께하는 중고교 통합 6년제 기숙형 비인가 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충북 제천시 최남단 산골이란다. 저자의 옹골찬 교육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안학교는 공교육과 협력 관계가 되어야 한다. 대안학교를 운영하면서 쌓인 데이터를 분석하여 창조적으로 변용한다면 대한민국 교육혁명에 씨앗을 뿌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대안학교는 공교육 출신으로 위기에 처한 학생들을 위탁하는 곳이나 필요할 때마다 대안학교의 '혁신 사례'를 수집하여 공교육에서 참고만 하는 곳이 아니다. 요즘의 '앱 제너레이션'은 포장된 자아, 위험 회피 성향, 불안감 증가에 시달린다. 입시에 휘둘리지 않는 아이들은 풍족한 시간에 따른 자유를 누리며 사람은 물론 자연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결국 그들은 균형 잡힌 인성을 갖게 된다. 


인격체로서 존중받는 민주학교, 개인의 개성과 관심사 중심으로 배우는 학교에서 아이들은 각자 공부하는 이유를 찾도록 내면세계를 깨워야 한다. 시험 없는 배움도 있으며 때로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도 말이다. 저자가 하는 아래의 말은 가슴을 찢어지게 한다. 


"'수능 포기, 건들지 마요!'란 팻말을 세워두고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아이를 떠올려 보라. 감히 누가 그 상처 입은 영혼을 흔들어 깨울 수 있으랴. 그 아이는 단지 시험을 포기했을 뿐인데, 왜 배움까지 멈췄을까? 시험 바깥에 존재하는 배움을 경험한 적이 없던 탓이리라."


루소는 아이들을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으로 표현했다. 자본주의 바탕의 시험 위주 학교가 없어지면 아이들은 두려움을 거두고 배움의 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높은 지대 수입을 보장하는 상위권 대학은 학력주의, 학벌주의, 서열주의를 포괄하는 절대적인 능력주의 사회(meritocacy)의 대표주자다. 교육이 대물림되는 상황에서 시험 제도는 공정하지 않다. 시험으로는 일부 능력만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사회적 및 정치적 동물이다. 관계를 맺음으로 인하여 성숙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관계 맺음 기회와 시간을 박탈하는 가정, 학교, 사회에서는 치열한 경쟁만이 있고 경쟁 이후에는 승자독식만이 존재한다.  


1990년대, 대한민국의 대안학교 형성기부터 영향을 끼친 '서머힐'은 잉글랜드에 있는 기숙형 사립 대안학교로, 6~16세의 80여 명이 재학 중이다. 간디학교 역시 그 학교의 영향을 받았다. 자기주도학습은 학생 개개인을 운전석에 앉히는 것과 비슷하다. 인성은 삶 속에서 부대끼면서 단련되는 것이지 교육 대상이 아니다. 우리나라 '인성교육법'이 얼마나 실현성 없는 껍데기 제도인지 학교에서는 잘 알고 있다. 우리 교육 제도의 가장 취약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는 독립적으로 사유하며 비판적으로 의식하는 개별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사건이다. 변화를 위해 실천해야 할 사회적 및 도덕적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 참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별로 참사로부터 배운 게 없다. 2022년, 서울 한복판에서 '10.29'참사로 159명의 귀중한 목숨이 희생된 것을 보면 말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제천간디학교의 고3인 찬솔이의 두 번째 창작 소설 집필 계획을 보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간디학교에서 시행하는 학습자를 핵심 지식과 이해로 초대하는 과정인 프로젝트 수업은 존 듀이의 교육 신조인 '행함을 통한 배움'(learning by doing)과 비슷하다. 시도 교육청이 지역사회 공립 대안학교 설립 계획을 지역사회 주민들이 '혐오시설' 취급을 해 막았다는 이야기는 정말 슬픈 내용이다. 교육 당국은 돌봄이나 치유가 필요한 학생들을 공립 대안학교로 수백 명씩 보내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대안학교에 있는 아이들은 시험 때가 되면 원적교인 학교에 가서 9등급으로 깔아주는 역할을 한단다. 그걸 아이들은 '방석 하러' 간다고 말한다. 비참한 현실이다.  


2019년 기준으로 비인가 대안학교 한 곳당 연평균 370만 원이 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고 한다. '초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교사들, 교육 실천가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안학교 역시 '변형된 형태의 학원'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 공공성, 책임성, 전문성을 갖추는 일은 절대적으로 대안학교에 필요한 것이다. 간디학교에서의 통합수업 핵심 열쇳말은 '연결'이다. 역시 존 듀이의 말을 빌려보자. "미적인 경험 안에서는 지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융합된다." 투박하면서도 창의적인 노동을 하는 프로그램 역시 지겨움과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한다. 영국의 거트 비에스타 교수는 개인적 욕망을 좀 더 숙고한 형태의 욕망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민주주의를 배우는 과정이라 말한다. '역량'에만 교육에서는 '안 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1769년, 스위스 취리히 외곽에 23살인 페스탈로치는 '노이호프 빈민노동학교'를 세우고 무지몽매한 50여 명의 아이들을 모든다. 유지가 힘들어 4년 후에 문을 닫았지만 그는 민중 자녀를 위한 대안학교 실험을 평생 거듭했다. 가르치기 힘든 요소를 가르치려는 대담함이 교육 정신에 박혀 있어야 한다. 사람이 귀한 가장자리에서 대안적 문명은 발생한다.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라는 마르틴 부버의 말을 곱씹어 보자. 2001년, 어린이 11명이 입학하면서 국내 최초 초등 비인가 대안학교인 '광명YMCA 볍씨학교'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3기 신도시 계획에 배움터가 포함되면서 없어질 위기에 직면했다. 2022년 8월, '학교' 지위를 위한 경기도 교육청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볍씨학교는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교사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질은 경청과 인내이며 학생을 위해서는 자기 존재를 걸어야 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간디학교의 '이철수' 교사는 그런 의미에서의 제대로 된 교사다. 사회학자인 김형준이 말한 '연명교육'은 자녀의 학업 성공에 기대와 희망을 걸며 가정의 모든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다. "불안은 자유라는 이름의 현기증이다."라는 키르케고르 말이 떠오른다. 지난 6년 동안 제천간디학교를 떠난 교사는 16명이나 된다. 그들의 퇴직 이유는 바로 '소진'이다. 생각과는 달리 몸과 마음이 황폐해졌다는 의미다. 교육의 최대의 적은 아이와 청소년들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말살하는 부모의 지나친 욕망과 과잉 교육제도다. 근대식 사회체제로 출발한 지금은 학교 제도는 공리주의 철학의 구현 상징물에 가깝다. 교육개혁이 너무도 필요한 시점이지만 막상 실행하려면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다. '교육 기득권'의 요지부동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공교육 강연을 다녀온 나로서는 저자의 말이 가슴을 콕콕 찌르고 있음을 느낀다. 이처럼 대한민국 교육에 대해 개혁 방향을 제대로 알고 있는 분들이 있는데, 왜 우리 교육은 변함이 없는 것일까. 학벌주의나 능력주의가 주는 달콤함에 젖은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대를 물려주려고 하는 까닭이다. 좋은 대학 졸업장이 세상을 얼마나 편하게 살게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이 역시 '백래시'와 다름없다. 진보하는 세상에 저항하며 알량한 기득권을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 이미 '뻔뻔함'이 삶에서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알아채버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교육제도나 정책은 변하지 못하고 있다. 처참한 마음은 다시 한 번 간디학교 교가를 들으며 위로를 받으려 한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희망을 노래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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