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서은국 작가님의 행복의 기원
오래전부터 늘 꿈은 막연히 있지만 막상 해보려는 시도는 없었다.
가끔 나가는 글짓기나 시편 짓기에서 상을 받는 걸로
'어라? 작가 할까?' 했다 말고.
의사가 멋있게 "메스" 단 두 글자로 암묵을 깨면서 수술대 위에서의 마에스트로처럼 현란한 손짓으로 사람을 개복하고 봉합하여 의사가 될까도 했다 말았다.
그런 식으로 학창 시절엔 되고 싶은 건 많았고
그 결과 난 축구를 무진장했다.
성적은 들쑥날쑥 이었고 피부는 구릿빛에 이만 하얬다.
아닌가.. 이도 하얗지도 않았다..
오로지 흰 건 깔끔함을 유지시킨 어머니가 빨아낸
내 실내화였을 뿐.
그렇게 학창 시절은 뭐 하나 파고들지도 그렇다고
막 나가지도 않았다.
그저 흐르면 흐르는 대로 부딪치면 부딪치는 대로
휘면 휘는 대로 꺾이면 꺾이는 대로 살았다.
유연함이 강함이라 했다.
지금 와서 보면 유연함은 후회가 많을 수도 있겠다 싶다. 주관을 갖고 욕심도 내며 부딪쳐도 보고 욕도 들어본 애들이 지금 가만 보면 나름 삶답다.
물론 평가처럼 보이는 파렴치한 잣대일 수도 있으나
난 그들의 삶의 노력과 결과가 부럽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여 진심으로 삶답다 말한 것이다.
요즘 즐겨 읽는 책이 있다.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이다.
흔히들 행복은 의식적으로 고취하여 사로잡아야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선 본능적인 감각으로 인한 행동으로 우린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렇다.
우리 인간은 의식적인 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적이고 경험에서만 빗댈 수 있다.
그럼 행복은 그 테두리 안에서만 발현이 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능적인 면에서는 내가 의식을 뛰어넘는
즉, 생존이라는 영역까지 확장이 되면서
행복을 단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아
행복이 전부가 되지 않으면서도 행복도 누릴 수 있는 초월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행복하기 위해 사는 좁은 의미의 삶을
살기 위해 행복하는 초월적 행복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의 초석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 기반적 사상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강조가 된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공감이 됐다.
늘 행복을 위해 삶을 강요당한 문구나 스케줄 혹은
인생 태도를 배웠었다.
하지만 그건 행복만을 위한 거였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행위는 무엇인가?
바로 살아있기 위함이다.
행복은 살아 숨 쉬는 삶 속에서 단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통, 인내, 역경, 비난, 고난 등등
억척스러움이 존재한다.
그 모든 걸 행복을 위해 감내하고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로 치부하려니 탈이 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억척스러움도 하나의 방법이고 행복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해야 한다.
암에 걸린 억척스러움에서 난 삶을 배웠다.
암에 걸린 상태는 행복한 상태가 아니란 걸 유치원생도 안다.
꼭 행복 속에서
행복을 위해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처한 극한의 우울감 속에서도 삶을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본능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행위.
뭘 해야 그런 억겁의 우울 속에서도 배우고 더 나아가 운이 좋다면 행복까지도 거머쥘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게 진정 행복한 삶이 아닐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암에 걸린 덕에 삶을 배웠고,
글을 다시 썼으며 이 순간 폐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살아 숨 쉬고 있다.
말 그대로 살고 싶단 간절한 갈망을 본능적으로 하고 싶었던 글을 씀과 동시에 숨을 쉬며 살아내고 있다.
행복을 위해 사는 것보단 어떤 걸 해야 내가 살아 숨 쉼을 느낄 수 있을지 본능을 따르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삶답게 살아가는 내 옛 친구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