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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람 Jun 04. 2023

런던과 미술관

즐길 마음만 있다면 OK!

나는 내가 미술을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엄마는 나를 화실에 보냈는데 그때 내가 열심히 그린 사자를 보고 선생님이 "정말 잘 그렸다. 판다가 너무 귀엽네."라고 했었다. 어린 나이에도 사자를 판다로 착각한 선생님의 발언은 충격적이었고 그 이후부터 나는 미술에 급격하게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미술에 대한 나의 얄팍한 지식을 대변하기 위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미술은 내가 중학교 때까지 예체능 중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물론 이건 나와 잘 맞지 않던 미술 선생님의 영향도 크지만 그 당시 미술 시간에 받던 스트레스는 세월이 훌쩍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고등학교 때의 미술 선생님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내가 드문드문 기억할 수 있는 거라곤 고리타분한 미술 교과서와 톰보우 사비 연필, 그리고 스케치북. 이 정도가 다인 것 같다.


2010년, 런던에 처음 발을 디디고 테이트 모던에 학교 친구들과 구경을 갔던 날, 나는 미술관이 이렇게 재밌는 곳이라는 걸 온몸으로 배웠다. 말로만 듣던 '문화 충격'이라는 걸 그날 처음으로 겪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경험했던 미술관은 조금은 딱딱하고 예의를 차려야 하는 곳, 시끄럽게 굴면 안 되고 가지런히 줄을 서서 구경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테이트 모던은 내가 갖고 있는 미술관에 대한 선입견을 완벽하고 근사하게 부숴주었다. 들어서자마자 자유롭게 온몸으로 뒹굴 수 있는 널찍한 공간, 손으로 직접 만지고 올라탈 수 있는 미술 작품들, 그리고 영감을 받는 순간 즉흥적으로 바닥에 앉아 스케치를 시작하는 관람객들의 모습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단순히 눈으로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전시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또 한 가지 신기했던 건 현대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무척 다양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서울에서 한창 입소문을 타던 대림미술관에는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사람들밖에 없었는데 런던 미술관에는 유모차에 올라탄 아기부터 지팡이를 짚고 오시는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미술을 즐기러 왔다. 미술관에 대한 진입장벽이 한없이 낮다는 걸 의미했다. 내가 미술에 대해 얼마큼 아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즐길 마음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예술을 누릴 수 있는 문화가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물론 이건 모든 상설전시들이 무료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을 바라보는 테이트 모던 


테이트 모던은 사실 화력발전소였다- 발전소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음
저번 시즌 가장 인상깊었던 전시 - 루바이나 히미드
쿠사마 야요이 - Infinity Mirror Rooms

그 이후로 테이트 모던은 내가 런던에서 가장 사랑하는 미술관이 되었다. 십 년이 훌쩍 흘러버린 지금도 매년 테이트 멤버십을 갱신하며 테이트 바라기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는 중이다. 멤버십으로 멤버들만의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Member's room에서 밀레니엄 브릿지와 저 멀리 건너편 세인트폴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힘든 마음이 사르르 녹기도 하고 행복한 마음이 더 크게 부풀기도 한다. 테이트 멤버십이 있다면 테이트 모던보다 더 굵직한 거장들의 전시를 선보이는 테이트 브리튼도 무료다. 한 달에 £7, 만 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테이트 모던이 현대 미술의 메카라면 조금 더 클래식한 미술관으로는 코톨드 갤러리를 좋아한다. 물론 규모로 따지면 내셔널 갤러리를 따라오지는 못하지만 훨씬 더 한적하게 중세 미술부터 르네상스를 지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까지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균형 있게 전시되어 있어 인상주의 화풍을 좋아한다면 코톨드 갤러리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반 고흐, 폴 세잔,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폴 고갱, 오귀스트 르누아르까지 사랑스러운 작품들이 한 공간에 모여있어 눈을 제대로 호강시켜 줄 수 있다. 갤러리가 위치해 있는 서머셋 하우스의 웅장한 공간 안에서 예상치 못하게 느껴지는 아늑함도 코톨드만의 개성이다.

아름다움 그 잡채- 코톨드 갤러리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 에두아르 마네

런던에서의 미술관은 미술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신선한 도발을 일으키는 촉매가 되어주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내면과 소통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기도 한다. 미술관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든 한 가지 분명한 건 더 이상 예술 없는 나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런던에서 가장 쉽고 저렴하게 누릴 수 있는 건강한 사치가 있다면 그건 바로 미술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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