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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람 Jun 22. 2023

런던과 펍

술집 그 이상의 의미

영국 문화와 펍(Pub)은 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진득한 관계이다. 펍의 진짜 이름은 사실 public house, 한국 이름으로 하면 대중들의 집(?)이다. 펍의 역사는 15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에는 술집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일반 가정집에 술을 팔 수 있는 라이센스를 주었다. 그런데 그 가정집들 중 일부가 나중에는 투숙객을 받는 여인숙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술뿐만 아니라 음식도 제공하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 곳곳에 이런 형태의 여인숙(Inn)들이 늘어나게 되자 17세기 중반부터 이들을 통틀어 public house라 일컫게 되었다. '퍼블릭 하우스'라는 이름이 알려주듯 펍은 성인이라면 아무나 쉽게 접근해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자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사회적인 장소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펍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사교의 장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펍에 부담 없이 들러서 맥주나 와인, 사이다 (보통 사과로 만든 술)을 한 잔씩 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무알콜 음료도 시킬 수 있는데 술 대신 음료수, 차 또는 핫초코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연령대를 아우르는 음료를 판매한다. 오늘날의 펍에서도 음료와 함께 식사를 파는데 보통 버거, 피쉬 앤 칩스, 스테이크 파이, 치킨 티카 마살라와 같은 영국에서 대중적인 음식들을 판다. 대부분의 펍에서는 일요일마다 선데이 로스트를 팔기도 하니 영국의 음식이 궁금하다면 제일 먼저 펍에 가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런던에 오기 전 영국 드라마에서 본 펍은 한국 술집과 다를 게 없어 보였는데 런던에서 겪어본 펍은 단순한 술집 그 이상으로 다양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엔터테이너의 역할이다. 대부분의 펍은 정기적으로 펍퀴즈(pub quiz)의 날을 갖는다. 그야말로 펍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퀴즈를 푸는 것이다. 처음 펍퀴즈를 마주했을 때는 너무 황당해서 폭소가 나왔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남편과 동네 펍에서 파이를 먹으며 술을 한 잔 하고 있었는데 어떤 직원이 마이크를 들더니 "펍 퀴즈까지 10분이 남았습니다."라고 외쳤다. 이게 뭔가 싶어서 남편을 봤더니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오늘 이 펍에서 퀴즈를 연다며 퀴즈에 참가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얼떨결에 펍퀴즈에 참가하게 됐다. 술을 마시다 갑자기 퀴즈라니, 너무 건전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더 이상의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퀴즈쇼는 시작됐고 나와 남편은 갑자기 경쟁적으로 퀴즈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질문의 난이도는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우리는 결국 망했지만 펍퀴즈를 계기로 다른 테이블과 말을 터게 되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그날을 마무리했다. 펍은 확실히 한국의 호프집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걸 그날의 에피소드를 통해 배웠다.


펍은 축구팬들에게도 열렬히 사랑받는 장소다. 프리미어 리그 시즌 중에는 중요한 매치가 있을 때마다 펍이 사람들로 가득 차는데 런던의 인기 있는 펍은 축구를 중계하는 스크린만 3-4개씩 된다. '여기가 정녕 축구의 성지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월드컵 중에는 경기 때마다 펍이 그 나라의 이민자들로 가득 차서 축제의 장 느낌이 물씬 난다. 특히 런던에는 다양한 이민자들이 살아서 다른 지역의 펍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예스러운 영국의 모습을 간직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글로벌한 축제의 모습을 볼 때면 펍이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1500년대에 처음으로 펍의 문을 연 사람이 현대의 펍 모습을 본다면 뿌듯해하면서도 놀라지 않을까.


펍은 직장인들이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푸는 배출구이기도 하다. 일이 끝나면 친한 직장동료 서너 명과 근처 펍에 가서 맥주를 한 잔씩하고 집에 돌아가는 게 일상인 적이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펍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서서 술을 마시기도 하는데 내 동료들은 한 겨울에도 밖에 서서 술을 마셨다. 놀라운 건 그들뿐만이 아니라 추운 날씨에도 밖에 서서 술을 마시는 직장인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마실 순 없어서 스트레스 날림용으로 딱 한 잔만 마시고 집에 가곤 했다. 영국인들은 펍에서 술을 마시면 안주를 잘 먹지 않고 그야말로 빈속에 술을 들이붓는다. 서서 술을 마시는데 안주를 먹을 겨를이 어디에 있을까. 나도 빈속에 맥주를 마시고 집에 가서 배가 고파지면 열량이 높은 음식들을 먹곤 했는데 아마 그때의 생활이 내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많이 미쳤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영국인들의 하드코어 음주 문화를 보며 나는 평생 영국인이 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펍은 이렇듯 사교의 장 역할을 하지만 혼자라고 해서 못 가는 건 절대 아니다. 낮에 보는 펍의 모습은 퇴근 후의 펍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혼자 조용히 기네스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어르신이 있는가 하면 펍에서 과제를 하는 젊은이도 있다. 한적한 낮 시간에 유모차에 앉은 아기와 함께 브런치를 즐기는 엄마도 있고 그 옆에서 나도 조용히 식사를 하며 책을 읽는다. 큰 창 사이로 들어오는 영국 여름의 햇살을 만끽하며 평온함도 얻는다. 어젯밤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일상의 잔잔함만이 남았다.


나는 런던에 놀러 오는 친구나 지인들을 꼭 펍에 데려간다. 단 시간에 영국의 바이브를 흠뻑 느끼기에 펍은 참 좋은 곳이다. 100년도 더 전에 지어진 펍에서 영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어로 수다를 떨다 보면 기분이 묘하다. 과거와 현재가 섞여버린, 하이브리드 된 어느 지점에 와 있는 느낌이랄까. 혼자도 좋고 둘이어도 좋다. 술을 잘 마셔도 좋고 못 마셔도 좋다. 런던에 머무르고 있다면 꼭 펍에 가보자. 고즈넉한 펍에 앉아 오래된 나무 테이블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어제와 내일을 잇는 오늘이 좀 더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펍의 특이한 이름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1500년대에 지어진 펍의 내부
유명 인사들도 사랑한 펍
여전히 여인숙의 이름을 갖고 있는 펍들도 많다.
펍의 뒷마당, 비어 가든- 여름이면 사람들로 가득차는 이 곳.  
우리 동네의 큰 펍
템즈강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 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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