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보람 Oct 31. 2023

런던과 여름

어제부로 드디어 영국의 서머타임이 끝났다. 그 말은 즉, 공식적으로 영국의 여름이 지나갔다는 뜻이다. 영국의 겨울은 한국에 비하면 온화한 기온이지만 해가 빨리지고 비가 많이 와서 체감상 더 춥게 느껴질 때가 많다. 오후 네 시 반이면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해 어둑어둑해지고, 하루 종일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겨울비에 자주 마음이 지친다. 어디 나뿐만이랴.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본토 사람들에게도 영국의 겨울은 혹독한 계절일 것이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에게 여름은 단순히 한 해의 네 철 가운데 둘째 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겨울을 대비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를 쬐고 긍정적인 마음을 축적해야 하는 시간, 칙칙한 겨울옷은 접어두고 쨍한 햇살만큼이나 밝은 옷들로 도시를 물들여야 하는 때- 런던에서 맞는 여름이란 그런 시기다.


올해는 런던에서 정말 평온한 여름을 보냈다. 어쩌면 내가 런던에서 보낸 9번의 여름 중 가장 마음이 편했던 여름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딱히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한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불완전했고 자궁을 둘러싼 지병이 완쾌된 것도 아니었으며 이것 때문에 NHS와 사립 병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은 한결같았다. 그런데 올해 여름은 이상하리만치 소소한 것에 자주 감사하고 감동했다. 올 초에 남편과 떨어진 채 한국에서 고생을 제대로 해서 그런지 일상이 가져다주는 기쁨 하나하나가 다 소중했다. 일단 큰 기복 없이 나의 잔잔한 일상이 유지된다는 사실 자체가 (누구에게 고마웠는지는 의문이지만) 너무 고마웠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남편과는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고 원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번다는,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거나 무난한 일상이 나에게는 어찌나 특별하게 다가오던지. 힘들었던 시간을 통해 내가 또 한 뼘 자랐다는 게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마음이 안정되니 그제야 내 주변의 여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집과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할 때마다 수많은 새들이 보였고 그 새들이 지은 집이 얹혀 있는 나무도 보였다. 너무 신기해서 남편에게 저기 좀 보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예전부터 있던 새둥지고 나무라길래 머쓱했다. 하하하, 나는 지금껏 셀 수 없이 이 공원에 와 놓고 왜 이제야 봤을까. 마음의 크기에 따라 시야도 달라지는 건지 원.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몸을 이리저리 구워가며 비타민 D를 합성하는 영국인들을 보면 쭈뼛쭈뼛 다가가 그 옆에 돗자리를 깔고 나도 몸을 구웠다. 예전 같았으면 유난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올해는 나도 런던의 여름 풍경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나 보다. 아름다운 경관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배경의 피사체 정도는 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오구오구 잘했다 나 새끼). 이 정도면 병인가?


즐겁게 사랑하고 일하고 먹고 놀고를 반복하다 보니 훅 가버린 런던의 여름. 미련 없이 잘 지냈다고 생각하지만 서머타임이 끝날 때 드는 이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 점점 짧아지는 해를 보며 다짐한다. 여름 내내 축적한 이 추억들과 싱그러운 마음들로 내 안의 조명을 켜보자고. 해가 없다면 내가 해를 만들어야지 뭐. 올해는 혹독하기로 유명한 영국의 겨울마저도 사랑스럽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Goodbye British summer!


신나게 웃고 즐겼던 올해의 여름!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과 장애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