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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Jun 20. 2023

아시아계 이민자 서사에 주목하는 이유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보고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린 나날 순수하게 바라봤던 세상에 대한 기억은 평생 남는다. 나는 어렸을 적 가족 전체가 미국 동부에 장기 체류를 해야 했다. 어학연수를 한답시고 나만을 위해 간 것도 아니었고, 한 번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해서 간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미국으로 이주한 1세대 한인들의 도움을 받았고, 내 친구들은 대부분 2세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새로 이민을 왔다는 옆 집 N의 母는 일식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그저 맛있는 일식을 먹으러 간 줄 알았는데 레스토랑 주방에선 낯익은 N의 母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N은 나랑 같은 날 같은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라 학급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매 수업마다 2세대 한국인 친구들은 중간중간 선생님의 명에 따라 우리에게 더듬더듬 많은 것들을 번역해 주었다. N은 화장실로 불려 가 중국계 미국인 아이들에게 조롱당하며 자주 맞았다. 그걸 중국과 미국 혼혈계 아이인 E가 내게 카페테리아에서 실컷 떠들며 말해주었다. 그 학교는 적응하지 못하는 나와 N을 위해 매주 금요일마다 상담을 지원했다. 어느 날 나는 N과 붙어 다닌다는 이유로 상담실에서 새하얀 종이에 N이 진짜 학교 폭력을 당했는지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해야 했다. 들은 거밖에 없다고 했더니 상담 선생님은 그거라도 쓰라고 했다. 네 줄을 꾸역꾸역 끄적이고 나왔더니 그다음 주였나, N은 친구들이 오해하는 것 같다며 이제 그만 붙어다니자고 했다. 6개월이 지나고 우리 마을의 한인들과 히스패닉 친구들은 숲 속의 다른 공립학교로 강제 전학을 가야 했다. 이유는 아직까지 모른다. 나름 영어가 늘었고 수학을 잘해 그곳에선 베트남계 미국인이었던 M과 함께 반에서 우등생으로 꼽혔다. 알게 모를 동질감을 느껴선지 늘 M과 함께 다녔다. 반면 머리가 레몬색이고 눈이 연하늘색이었던 백인 L은 우리를 야만인 취급했다. 한국 친구들끼리 상한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고 있으면 따로 불러내 앞에 앉혀두고 제발 그런 행동을 그만하라고 했다. 누가 봐도 이름까지 한국인이었던 친구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로도 끝까지 영어만 사용하며 자신이 미국인이라고 우겼다. 유학으로 왔던 한국인 A는 영어 발음을 엄청 굴리며 미국을 높이고 한국을 낮췄다. 10여 년 전 겪은 실제 나의 이야기다. 가장 친했던 2세대 한국계 미국인 I와는 아직까지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N과는 몇 년 전 연락이 다시 닿았지만 한국어를 완전히 까먹은 미국인이 되었다.


미국에 살 적 한국으로 보냈던 이메일들.


답장으로 받았던 할아버지의 메일 중 일부




 요즘 아시아계 이민자 서사를 그린 작품들이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으로 이주한 디아스포라의 고군분투를 그리는 <미나리>와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이어,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BEEF)> 까지 보고 나서 그제야 깨달았다. 이민을 가본 적도 없으면서 남들보다 유독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삶에 깊게 공감하며 몰입하는 이유를. 그 이유는 바로 위에 써둔 이민자 사회를 겪었던 어린 시절의 나의 경험담과 연결된다. 뉴욕에 본사를 둔 영화 배급사 'A24'가 지원하는 영화들은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많아 믿고 보는 편이다. 씬 한 컷 한 컷의 연출도 감각적인데, 작품의 묵직한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며 재치 있는 작품들을 잘 발굴해 내는 편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다룬 세 작품 역시 모두 A24가 배급한다. 이전부터 할리우드 영화 속 아시아인은 주인공 옆을 늘 따라다니는 친구, 어디 하나에 단단히 미쳐있는 '너드' 혹은 돈을 어떻게든 아끼려는 구두쇠로 표현됐다. 하지만 이제는 훨씬 입체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그려낸다. 특히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서는 출연자 대부분과 감독이 실제로 한국계 미국인이기에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 없이 미국 이민자 사회를 사실적으로 직시한다. 이 점이 솔직 담백하여 마음에 들었다.


스티븐 연이 일을 찾으러 한인교회에 갔다가 찬송가를 들으며 오열하는 장면은, 얼핏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한다. 삶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왜 종교에 의지하는지 얼핏 알 수 있다.

특히 나는 이 작품에서 '한인 교회'가 갖는 특수성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무신론자인 내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미국에서의 한인 교회'는 유독 교포들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는 듯하다. 한인회와도 떼어놓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 역시 미국에 살 때 여름 방학이 되면 한인 교회에서 '서머 캠프'라는 이름 아래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밥을 먹고, 앞에 수영장 풀에서 놀았다. 단순히 종교적 의미만을 품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성난 사람들>의 감독도 교포 출신으로서 이를 동일하게 느낀 모양이었다. 작품의 아주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티븐 연과 내가 한국 교회에 나가며 자랐듯, 그저 어린 시절의 일부를 드라마에 담아내고 싶었다.'라고. <성난 사람들>은 직접 그 사회를 경험해 본 자들의 시선을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다.

 

beef는 영어로 ‘불평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스티븐 연과 애슐리 박에 이어, ‘애프터 양’에서 봤던 저스틴 민 배우까지 총출동한 작품 <성난 사람들>

 내가 왜 그동안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을까에 대한 대답을 찾은 느낌이다. 나는 드라마에서 유년 시절의 나를 발견했다. 그러나 사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 <성난 사람들>이 가져가는 보편적인 감상은 아닐 듯하다. 주요 내용은 디아스포라의 고군분투가 아니다. 오히려 감독은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적인 요소를 일부로 넣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경험을 녹아내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이 넷플릭스 드라마가 만국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이유는 각종 씬에 등장하는 설렁탕이나 김치찌개, 카카오톡에서 찾을 수 없다. 나도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분노가 많을까?'라는 광고 문구에 이끌려 클릭하게 된 작품이었다. 서로 지극히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찌나 저쩌나 겪게 되는 공통분모의 감정, '분노'. 공통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화를 내고 참으며 혐오의 이빨을 드러낸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결국엔 어떤 식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서사이다. 그 바탕에 미국 이민자들의 삶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 배경이 작품과 인물들에게 다채로움과 입체감을 불어넣어줬다는 확신이 든다.


 각 화의 제목도 묵직하게 잘 뽑아냈다. 철학자들의 말들로부터 인용했다고 한다. 제목과 함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최'가 그려낸 기이한 회화 작품을 각 화 앞부분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회화 작품과 철학적인 의미를 지닌 제목, 그리고 배경 음악까지 삼박자가 완벽하게 들어맞으면서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확 증가시킨다는 점이 재밌었다. 특히 마지막 화의 제목은 '빛의 형상'으로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칼 융이 썼던 '깨달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어두움을 의식하면서 온다.'라는 구절은 결국 분노의 이유를 남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여러모로 오랜만에 넷플릭스에서 볼거리를 찾은 느낌이다. 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후 첫 신선한 충격이다. 넷플릭스가 있다면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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