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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Oct 13. 2024

2024 여름 끝자락 기억

튀르키예에서

새벽 1시, 텅 빈 중국 상하이 푸동 공항의 노숙자가 되어 카트를 타고 다니며 깔깔 웃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이보다 더 유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웃으며 주저앉을 때, 지나가던 몇 안 되는 이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유료라는 VPN으로 와이파이를 우회하려는 K의 시도를 못마땅히 여긴 나는 세수를 하고 돌아와 공항 의자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저장해 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를 보고도 오랜 시간 지치는 육체와 정신에 온몸을 들썩였다. 그럼에도 17시간의 경유와 맛없는 저가 항공의 기내식을 겨우내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마음 맞는 이가 함께였기 때문일 테다.


작년 교환학생 생활의 8할 정도를 홀로 여행했다. 누군가에게 나의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의 독립성을 갖고 있는 걸까 싶었는데 K를 만나고 그런 것만은 아니겠다 싶었다. 혼자를 단단히 지켜낼 수 있는 법을 터득하고 만난 누군가와의 비일상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상반기는 꽤나 굴곡졌지만 그 경사를 함께 오르내리는 이들이 함께였기에 내 세계는 한층 더 넓어졌다. 사소한 일에도 구차한 변명을 달기 바쁘던 나와 달리 그들은 지나간 일들에 묵직한 감정을 싣지 않았다. 나름 활자를 붙잡으며 의연하게 버티고 살았다고 생각한 내가 언젠가부터, 왜, 어째서, 크고 작은 일들을 같은 무게로 초조해하고 있는 거지 싶었다. K를 포함한 그들의 성숙이 가끔은 부럽고 질투가 나서 헛웃음 날 지경의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왜 이런 생각 정리는 늘, 타지든 어디론가 떠나 다시 붙들게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K는 ‘나름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널 포함한 귀중한 인연 하나 둘을 맺어가며 얼마나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미숙했는지 깨달았다’라는 문장을 꾹꾹 눌러 담은 활자 뭉텅이를 내게 건넨 적 있다. 언짢고 비슷한 감정을 전이하고, 서로의 감정을 배출하며 상처를 핥아준다는 것만이 함께 한다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런 것만이 투게더라면 차라리 혼자를 택하겠다를 선호한 내게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따스함을 알려준 이들이 있었다. 이스탄불 전통 시장에 들러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조리며 선물해 줄 파란 악마의 눈을 불투명한 플라스틱 박스에 한 개씩 담았다. 옆에서 함께 기념품을 봐주던 K도 알고 있을 정도로 아주 오래, 자주 언급했던 이름들이었다. 몇 안 되지만 올해 꽤나 귀한 인연을 마주했구나, 그것만으로도 오래 기억할만한 여름이었다고 속으로 곱씹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 년 전 기억을 더듬어가며 수십 번을 오갔던 이스탄불의 이스티클랄 거리를 걸었다. 그때 그 시절의 언어가 들렸다. 특유의 툭툭, 공기를 터뜨리는 느낌을 주는 발음과 억양. 그 언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말을 걸면 한참 나를 신기해하는 표정까지, 달라진 게 없었다. 교환 시절 매달 방문했던 랄랄라 이스탄불 민박집도 서울에 있던 내 방만큼이나 여전히 편안했다. 단기 연수를 마치고 귀국 준비에 한창인 익숙한 얼굴의 후배들을 만났다. 그림자조차 지지 않을 정도의 쨍쨍한 햇빛 아래서 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그리곤 몇 번 터키에 와봤다는 K와 서로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꺼내먹었다. 수년 전 그에게 터키어를 가르쳤던 내가 함께 실무에 투입된다는 느낌으로 언어를 써보니 괜스레 손에 땀이 났다. 계절이 다른 추억들은 같은 공간에서 다채롭게 피어났고 함께했던 옛 기억들이 같은 공간으로 소환됐다.



그리고 새로운 추억을 한 공간에서 쌓아 나갔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도시에 또다시 새로운 감정이 들러붙었다. K에게 가장 좋아하는 요거트 집을 소개해주고자 40분을 달려 이스탄불의 외곽지역에 도착했고, 1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던 홍합밥 로컬 식당에 데려다주겠다는 으름장을 내놓으며 K를 끌고 다녔다. 애정하는 사람들에겐 꼭 소개해주는 나만의 필수 코스였으며, 사랑을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작년 여름, 이스탄불에 놀러 왔던 동창 J와 母에게도 이 작고 소중한 욕심을 드러내곤 했다. 노을이 질 무렵 페리 난간에서 K는 아날로그 카메라를 들고 사진사를 자처했고, 타이타닉이 떠오른 나는 영화 OST 중 하나인 'The portrait'을 연신 흥얼거렸다. 페리를 타고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갈 때 K 몰래 홍합밥을 한 두 개 까먹으려고 했고, 홍합밥 입이 굳게 닫혀있던 탓에 쉽사리 들통났다. 가벼워진 홍합 조각들을 어둑해져 새카매진 해협 한가운데로 던졌다. 가벼운 탓에 멀리 나가지 못한 껍데기를 보며 K는 더 힘껏, 멀리 던져보라고 했다.


물탐험도 자주 떠났다. 밖에선 안경을 절대 쓰지 않는다는 철칙과 녹내장을 앓는다는 핑계로 수면 아래를 들여다볼 두려움을 떨쳐준 이도 K였다. 조심스레 물안경을 끼고 본 수면 아래는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물고기 도감을 통으로 외우고 어류학자가 꿈이었다는 K의 말도 정말이었다. 바다는 온통 에메랄드빛이었고, 그 옥빛의 농담만이 달랐다. 암초에 발이 수없이 긁혀 연한 상처가 났지만 그것 나름대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유람선이 떠있는 이스탄불 해협에 뛰어들어선 거센 수초를 헤치고 불가사리와 갯지렁이, 아직 꿈틀거리는 소라와 보말을 잡아 보여줬다. 지중해에선 형형색색 물고기, 암초에 붙은 커다란 조개와 새빨간 말미잘과 거대한 성게를 발견하곤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로 떠나던 항구에선 물가에 얼굴을 내놓은 바다거북이를 만났다. 어떻게 저리 모든 바다 생명의 이름을 꿰뚫고 있는 걸까, 지구의 모든 사랑을 놓치지 않고 신비롭게 대하는 K를 보며 생각했다.



올여름 터키, 작년에 무수히 들었던 짓궂은 농담은 없었고 동양인은 더욱 없었으며 이방인을 향한 낯선 시선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런 오묘한 감정을 K에게 줄곧 이야기하다 보면, K는 줄곧 뒤를 돌아보라고 말했다. 그럼 적어도 한 가족은 물끄러미, 무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안해진 나는 입을 꾹 다물곤 했다.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내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던 걸까, 이토록 일상 같은 비일상이었다.


결국 이곳도 사람 사는 도시였으며, 사소한 걸 포착해 의미부여를 가뿐히 해낼 수 있는 내겐 입맛대로 도시를 채색하고 빚어내는 건 순식간이었구나 싶었다. 그 순간을 직감했을 때, 예전과 달리 도시에 대한 복잡한 생각을 내려두고 표면화된 인상만을 좇았다. 모두가 잠든 민박집 거실에서,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고물 카메라로 담아낸 아날로그 순간들을 숨죽이며 넘겨 보았다. 1년 만에 돌아온 이스탄불은 내 일상의 아주 구체적인 일부가 돼 있었다. 설렘보단 편안함이 가득했던 공간, 그런 감상을 머릿속에 담아놓고 돌아와 이런 것들을 느꼈다고 브런치에 적고 있다. 순간을 보고 조각으로 정리해 기록하는 건, 내 삶의 방식이니까.


앙카라의 한 대학교에서


또 가고 싶다.



아래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가 인화한 사진들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찍어온 필름의 인화를 오랫동안 인내해 받아내는 것만큼 설레는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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