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 Nov 21. 2022

해방촌과 나

공간이 주는 힘

 삶에 있어 안락한 공간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만의 위로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서울 중심에 위치한 남산타워를 좋아했다. 어떤 짓궂은 날씨에도 우뚝 솟아있는 남산타워가 한결같이 그 자리를 유유히 지켜나간다는 점이 좋았다. 그 곁을 지키는 자그맣고 폭닥한 동네가 있다. 그곳이 바로 해방촌이다.


 해방촌에선 좋은 기억들이 한아름이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스>에 푹 빠져있던 20살, 친구들과 차가워진 손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녹사평 일대를 활보했다. 이는 해방촌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인데, 드라마 OST를 틀고 후암동의 한 초등학교 아래 골목을 거닐며 노을 지는 샛노란 서울 풍경을 한없이 만끽했던 것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고개를 돌리면 한눈에 보이는 서울 전경과 함께 해방촌은 골목마다 위치한 벽돌 주택들, 그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조용한 카페가 참 매력적인 공간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곳에서 취향을 숱하게 쌓고 힘들 때마다 꺼내 보곤 했다. 나에게 한없이 정겨운 이 동네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동네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나간다는 그 즐거움에 푹 빠져보길 바란다.




 

 해방촌과 가까이 붙어있는 후암시장에는 소문난 로컬 커피 맛집 두 곳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먼저 소개할 곳이 바로 노리밋 커피바인데, 공간이 많이 협소하지만 덕분에 오롯이 커피 맛에 집중할 수 있었다. 노리밋 커피바의 메뉴판이 꽤나 독특해 원두 취향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메뉴판은 4분면으로 나뉘어 묵직함, 가벼움, 고소함, 산미로 원두를 분류해둔 덕에 쉽게 원하는 맛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날은 저녁에 방문했기 때문에 묵직함보다는 가벼움을, 산미를 선호하지 않는 나였기에 고소함을 택했다. 가벼움과 고소함, 이 두 교집합에서 찾아보기로 했고 '오늘의 추천' 마스킹 테이프가 붙여져 있던 '과테말라 라 콜리나' 필터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색이 맑고 투명한 만큼 맛도 깔끔하니 좋았다.



 함께 추천받은 시그니처 커피인 노리밋 라떼는 디카페인 커피 크림이 위에 올라가있으며 아래에는 펌킨 스파이스가 들어간다.



 시장 골목에서 가성비가 좋은 에스프레소 바를 두 곳이나 찾아 고급진 크림 커피를 맛볼 수 있다니 감사하다. 노리밋 커피바 건너편에 위치한 오르소 에스프레소바는 커피를 두 잔 시키면 한 잔을 비운 뒤 입가심을 할 수 있도록 탄산수를 내어준다. 에스프레소 바에는 자주 가보지 않아 원래 내어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덕분에 깔끔한 입가심과 함께 다음 커피 잔을 들었다.


에스프레소 베이스라 무척 진하다.




 후암시장에서 해방촌으로 넘어가는 조용한 길가에는 그랑핸드 남산점이 위치한다. 향기가 그리울 때 종종 들렸다. 그랑핸드는 나를 향의 세계로 안내해준 고마운 브랜드이다. 워낙 브랜드 철학이 독특하기도 하고, 향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다는 느낌이 강해 한 번 방문하면 잊을 수 없다. 향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부터 단문으로 향과 어울리는 에세이를 적어두는데 그 글들이 읽기 좋다. 향을 활자화해두는 공간이라니! (=청각의 시각화?)


제품을 구매하면 원하는 문구를 도장으로 찍어준다.


 그랑핸드 남산점은 매장에 입장하자마자 손을 씻어야 한다. 물론 핸드워시 역시 그랑핸드 제품으로 포근한 향을 머금고 있다. 들어오자마자 자신들만의 향으로 고객을 사로잡는다는 점이 일종의 마케팅 수단임을 알면서도 흥미롭다. 더 재밌는 것은, 세면대가 매장에 위치해있음에도 인테리어에 전혀 해가 되지 않고 모던하게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더불어 뒤편에는 잔잔하고 고요한 티라운지가 위치해있다. 통유리로 된 창문을 통해 서울 전경을 내다보며 차를 마시는 여유를 느껴보자. 참고로, 노을질 때 가면 노르스름한 채광으로 더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향수에는 관심이 없던 나지만 그랑핸드라는 공간에 애정을 붙이게 되자 자연스럽게도 향수에 더 많은 관심을 품게 되었다. 향은 한 사람의 분위기를 표현해줄 수 있는 수단이자 기억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새 작년 이맘때쯤 사용하던 그랑핸드의 상쾌하면서도 달달한 MARINE ORCHID향을 자기 전에 침구에 뿌리곤 하는데,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과 그때의 이야기가 떠올라 기분이 묘할 적이 많다.


티라운지


알록달록한 가을의 그랑핸드!




 수고로이 골목을 걷다보면 작은 독립서점들도 볼 수 있다. 독립서점의 매력은 바로 서점 주인의 취향이 잔뜩 담긴 책이 가득하다는 점이다. 샘플 책 안을 펼쳐보면 서점 주인이 적어둔 생각이나 물음이 적혀있고 좋은 문장들에 밑줄이 그어져 있기도 하다. 해방촌 골목에서 마주한 독립서점 안에서는 몰랐던 취향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좌) 별책부록 (우) 고요서사, 고요서사는 문학서점 느낌이 강하다.




 후암시장과 그랑핸드가 있는 남산 산책길을 지나면 사람이 사는 동네, 해방촌 오거리가 나온다. 이곳에 위치한 신흥시장 골목골목은 언제나 공사를 하느라 바쁘다. 다소 칙칙하고 낡아보이는 공간이지만 해방촌에 놀러오는 사람들을 위해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즐비해있다. 그중에서 맛이 제일이었던 디저트 카페는 단연 르몽블랑이다.



 신흥시장 계단 한 켠을 꽉 쥐고 있는 르몽블랑은 20년 간 자리를 지킨 한 편직공장을 이어받았다. 덕분에 카페 내부에선 재봉틀과 옷감같은 인테리어를 확인할 수 있다. 편직 공장에서 자리를 이어 꾸려진 카페인만큼 털실 무스 케이크가 제법 유명하다. 털실 무스 케이크도 달달하고 상큼했지만, 이 집은 레몬이 들어간 모든 디저트가 일품이다.




 이렇게 취향을 곁들인 해방촌의 곳곳을 가끔씩 소개해보고자 한다. 위 주소는 숱하게 해방촌을 오가며 보고 담은 것들을 모아 간단히 만들어둔 나만의 플레이스 리뷰어다. 혹여나 근처에 가게 된다면 이 글과 리뷰어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해방촌이 나에게 그랬듯 여러분께도 마음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