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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Sep 11. 2024

대구 스테이크로 회복하는
나에 대한 신뢰

피터팬과 후크가 전해주는 담백 삼삼 자아 수호


마트에서 냉동 대구 스테이크와 마주쳤습니다.


대구 cod. 피터팬이 후크를 놀려줄 때 지칭했던 그 생선입니다. 영국의 대표 음식 '피시 앤 칩스'의 그 피시입니다. 가시도 별로 없는 것 같고 한 번 해 먹어 볼까 싶었지요. 그렇게 집에 오게 된 대구. 에어프라이어에 대구와 적당히 자른 양파를 넣고, 허브솔트 뿌리고, 180도 15분 기본 세팅으로 돌렸습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생선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식탁에 구운 대구와 양파를 올리면서 가족들에게 피터팬 얘기를 해줬습니다. '피터가 인디언 소녀 타이거 릴리를 구할 때, 목소리로 후크인 척하잖아. 후크 부하들은 목소리만 듣고 타이거 릴리 놓아주고.' 다행히 아이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요. 그때 피터가 후크한테 '넌 대구야'라고 말했다고, 이게 바로 그 대구라고 해줬지요. 아이들은 우리가 지금 후크를 잡아먹는 거냐며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너는 누구냐? 어서 말해라."

후크가 물었다.

"나는 제임스 후크. '졸리 로저'호의 선장이다."

목소리가 대답했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후크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것아. 다시 한번만 그런 말 하면, 너에게 닻을 던지겠다."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후크는 이번에는 아주 저자세로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당신이 후크라면,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이요?"

거의 애원하는 듯한 말투였다.

"너는 생선 대구다. 대구일 뿐이라고."

목소리가 대답했다. (비룡소 p.162)



후크가 대구일리 있나요. 책 읽을 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후크와 그 부하들의 반응이 기가 막힙니다. 부하들 뿐 아니라 후크도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해요.



"대구라고!"

후크는 공허하게 되뇌었다. 지금처럼 그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난 적은 없었다. 후크는 부하들이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선 대구를 두목으로 모셨단 말이야? 이 무슨 창피한 일이람."

부하들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부하들은 후크에게 꼬리 치는 개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자신의 처지가 전락했다고 해도, 후크는 부하들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낯선 목소리의 말에 맞서기 위해 후크에게 필요한 것은 부하들의 신뢰가 아니라 바로 스스로에 대한 신뢰였다. 그러나 후크는 자신의 자아가 빠져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를 떠나지 말아줘."

후크는 쉰 목소리로 자아를 향해 속삭였다. (p.162)



이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신뢰'라고 책에 쓰여 있네요. 그럼요 내가 나를 믿어야지요. 저딴 말에 훅 넘어갈 일이 아니죠. 아마 후크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사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이게 쉽지가 않아요. 당장 누군가 내게 목소리를 높여 따지듯 말하면,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면, 나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기 십상입니다.


제가 그랬어요. 얼마 전 회사에서 해외로 실어 보낸 물건의 배송과정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어요. 회사에서 진행한 수출이 수천번은 될 텐데, 하필이면 최근 공들여 거래를 튼 바이어의 첫 수출 배송에 문제가 생겼거든요. 이유인즉 기가 막히도록 사소한 것이었지만. 쨌든 물건이 일단 바이어 창고에 도착해야 했기에, 업체의 통관 담당과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통화에서 상대방의 기본 태도가 매우 하대하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름휴가 전 출고 일정을 맞추려고, 예정 스케줄보다 앞당겨 시장반응을 올해 안에 확인하려고 저희 회사에서 꽤 노력해 내보냈는데. 그걸 딱 잘라 그저 스케줄대로 했을 뿐이라더군요. 당시에는 일단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 생각해서, 말꼬리를 잡기보다는 암튼 너 정말 속상하겠다 말해줬는데. 전화를 끊고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그녀의 한마디에 나의 품위가, 우리 회사 사람들의 노력이 깡그려진 기분이 드는 겁니다.


대구 스테이크를 먹으며 꺼낸 <피터팬>의 후크 이야기가 내 마음을 파고듭니다.


피터가 후크를 대구라고 지칭하고 호통치니, 후크가 되려 스스로를 의심하는 모습이 다시 보여요. 정말 그렇잖아요 : 전화 너머 그녀의 한 두 마디에 우리 회사 사람들이 노력한 일이 없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데 가서 이렇게 빠르게 원하는 제품 제작과 서비스해 줄 수 있는 곳이 있는지, 흥, 찾아보라지, 뭐 많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흥이다!) 거래가 혹시 틀어진다 하더라도 (물건이 괜찮다면 틀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거니와), 이번 경험이 다른 일로 연결되는 새옹지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정말로 길게 보면 인생사 새옹지마더라고요.) 따지고 보면 해외 운송 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문제를 하나 더 알게 됐으며. (수업료가 너무 비싸긴 합니다.) 이게 회사에 아주 독보적인 수익을 주는 거래도 아닌데. (사실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새로운 시장이기도 하고요. 야튼.) 내가 계속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있나. (!) 이런 생각에 다다르더군요.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던 것은 아닙니다. 얼마간의 자괴감과 불면증, 알 수 없는 불안의 터널을 지나고 몇 통의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에야. 구름 사이 햇빛과 산, 달, 나뭇잎에 이는 바람을 한참이나 쳐다본 후에야. 주변 청소 정리를 어느 정도 한 후에야. 후크처럼 자아가 빠져나가던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당장의 거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나의 품위, 우리의 품위요.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따지고 보면 부적 같은 것도 그런 믿음과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요. 이 부적을 쓰면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믿음, 자신감이요. 








대구 스테이크는 맛이 좋았습니다. 사실 엄청 특별한 맛은 아니에요. 삼삼 담백 고소합니다. 양념으로 뿌린 허브 솔트를 잘 살려주는 맛인 것도 같아요. 애호박과 구워 식사용으로 먹기도 했고. 야식으로 대구와 감자, 그러니까 나름 피시 앤 칩스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튀긴 것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대구와 감자였지요. 가족 모두 흡족해한 야식이었습니다.


저의 자아가 아주 특별한 색을 지녔으리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 역시 아마 대구의 맛처럼 삼삼 담백할 것 같습니다. 특별히 진취적인 것도 아니고, 유별나게 똑똑한 것도 아니며, 예쁘지도 않아요. 하루살이처럼 살고, 숫자 실수를 꽤 자주 하며, 좀 왜소한 아줌마에 가깝죠. 그럼 뭐 어떤가요. 내가 흡족하고, 딱히 세상에 해가 되지 않으면, 그것으로 된 거죠. 음.. 조금 친절을 더 베푸는 사람이면 좋긴 하겠네요.


가족 모두가 잠든 이 밤. 베란다 캠핑의자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 들으며 이런 글을 끄적이는 지금 마음 같아선. 흡족한 삶을 잘 살아낼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네요. 



https://commons.m.wikimedia.org/wiki/File:Gadus_morhua_Cod-2b-Atlanterhavsparken-Norway.JPG#mw-j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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