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 아이들 스마트폰, 내년 사업계획, 제사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했다.
며칠 전 닭 삶은 물이 있어서 그걸 활용해서 끓였다. 된장 풀고 무, 감자, 양파를 넣었다. 물음표가 찍히긴 하지만 그래도 맛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희미한 된장찌개다. 이쯤 궁금해진 남들의 시선. 닭 육수 된장찌개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대부분 고춧가루를 풀어서 끓였더라. 닭 육수는 매콤하게 먹으면 더 맛있나?
그래서 김치를 넣어봤다. 앗. 맛이 달라졌다. 별로 바람직하지 않았다. 고추장을 넣어봤다. 역시 잘 모르겠는 맛. 모양새는 이미 부대찌개 같아졌다. 맛은 오묘하다. 김치찌개와 부대찌개와 된장찌개 사이의 알 수 없는 지점 같았다. 에잇. 수습이 안된다. 구원투수가 필요하다. 스팸을 꺼냈다. 끓인 물에 3번 씻은 스팸을 양파와 추가했다. 내친김에 김치도 더 넣어서 푹 끓였다. 일요일 아침, 식구들은 모두 맛있게 밥을 비웠다.
계획한 것은 된장찌개였으나 부대찌개가 나왔다. 우리 집 식탁은 그야말로 계획보다 대응의 영역이다. <흑백요리사>의 심사위원 안성재라면 지체없이 '탈락'을 외쳤다. 우리 집 식탁에 요리사의 의도나 계획 같은 것은 팽개쳐진지 오래니까 (맛은 논외로). 그날 그날 어쩌다가 후다닥 대충 차리는 식탁이니까. 이름하여 오대식, 오늘만 대충 차려 먹는 식탁.
계획이 없지는 않았다.
그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다. 하긴 식탁뿐인가. 좀 더 긴 호흡으로, 아이들의 스마트폰 생활도 절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더라.
첫째에 이어 이제 둘째도 스마트폰을 붙잡기 시작했다. 둘째의 것은 전화번호가 부여되지 않았다. 옛날에 아마도 내가 쓰던 것이고, 아이의 책읽기 녹음과 나와의 연락을 위해 줬던 것이다. 요즘 퇴근 후 집에 오면 둘째가 책읽기 녹음을 하는 장면 보다는 캡컷으로 영상편집 하면서 노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연예인 동영상을 편집하기도 하고, 반 친구들과 같이 찍은 영상도 편집하는 모양이다. 내 눈에는 그 영상들이 쇼핑몰의 정신없이 화려한 느낌을 닮았다. 그걸 서로 메시지로 주고받더라. 첫째는 소소한 게임과 관련 영상 보느라, 둘째는 캡컷 영상편집 하느라 하루 30분에서 2시간을 붙잡고 있다. 당연히 숙제는 뒤로 밀린다. 평일에서 주말로, 이번주에서 다음 주로. 어효.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 식당에서 동영상 보여주기 싫어서 외식도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합의한 몇 안 되는 육아원칙 중 하나가 스마트폰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가 커서 스마트폰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달까. 게임은 엔딩이 있는 콘솔게임부터 시작하게 하고, 차근차근 자기 통제력을 키워가며 게임과 전화기를 쥐어주려고 했었더랬다. 계획은 백지화된 지 오래다. 여기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그렇다고 무작정 제한할 수도 없고. 아이의 자율을 존중해 주면서 최소한의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매일이 대응과 고민과 실망과 대응의 연속이다. 캡컷이란 편집 프로그램은 계획에 등장한 적도 없었다.
계획이란 놈은 허풍이 천성이다.
회사 사업 '계획'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렇다. 하향 조정은 있을 수 없고 언제나 위를 바라보게 되어있으므로. 계획은 기대를 부른다. 애초에 계획이 없으면 어긋날 일이 없을 텐데. 기대가 없다면 실망할 일도 없겠지. 그래서 계획도 기대도 없으면 자유로울까. 글쎄올시다. 대응은 어차피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그나마 아름다운 계획과 기대가 있는 인생은 허풍일지언정 포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족스러운 인간 생활을 위해서는 순간순간의 행복뿐 아니라 뜬구름 잡는 꿈과, 고생해서 이뤄가는 꿈도 필요하더라. 그 꿈을 꼭 계획대로 이루진 않더라도. 이렇게 저렇게 해내고 싶다는 이상과 노력, 그 과정에 방점이 찍힌다. 그게 보통 사람들이 얘기하는 인간의 미덕이지 않나.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넘어서 진짜로 꿈을 이뤄내는 인간은 확실히 위대하다고 인정해줘야 한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하나인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여기에도 그 꿈과 고생길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책 속 문명 세계에서는 무스타파 몬드 같은 관리인이 세심하게 배려하여 계획한 대로 사람들이 살아간다. 스스로 계획하고 대응할 필요가 없다. 이 경우 생활은 편안하고 위생적이고 적당하며 걱정할 것이 없다. 먹을 것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돈도 문제가 없다. 아이도 연인도 가족도 없다. 늙음도 없다. 개인이 세울 수 있는 계획이란 것은 오로지 소비하고 놀 계획 정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꿈이 없고, 오래된 것이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만 있다.
현재만을 산다.
어. 이거 딱 요즘 트렌드 아닌가.
야만인 존은 뿌리와 열매 없이 현재의 꽃만 둥둥 떠 있는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다. 에덴동산 같은 문명 생활보다 광야에서 '불행할 권리'를 무스타파 몬드에게 요구했다. "I'm claiming the right to be unhappy." (p.212 Aldous Huxley <Brave New World> Vintage) 그는 또 흠모하는 레니나에게 너무 쉽게 사랑하기보다 '고상하게 고생스러운 길'을 제안했다. "I'd like to undergo something nobly." (p.167 Aldous Huxely <Brave New World> Vintage) 그래서 존은 불모지로 떠난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에덴 보다는 광야에서의 고생스러운 대응하는 삶, 남보다는 내가 계획하고 고생하는 삶이 인간으로 태어난 양심을 지키는 길이다. 에덴을 지키는 케루빔은 내 양심인지도 모른다.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욜로 뿐 아니라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꼰대의 삶도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음으로 공감되기보다 머리로 끄덕이는 이야기이긴 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던가.
모르겠다. 이건 계획된 글쓰기가 아니다.
대응하는 글쓰기다.
시댁 제사가 10월에만 두 번 있었다.
두 번의 제사 중 한 번은 내가 고양이손일지언정 도우러 갔었다. 나머지 한 번은 회사일이 마무리되지 않아 저녁 7시가 되어서야 갈 수 있었다. 제사상을 시모 혼자 다 차려냈다. 미리 전을 사가겠다 제안했으나 그녀는 괜찮다며 혼자 차리는 길을 고수했다. 내가 도운 적도 사실 별로 없다. 그날 저녁 그녀의 등은 더 굽은 듯했다. 발에서 불이 나고, 눈도 어질어질하다고 했다. 후손이 아프길 바라는 조상이 있을 리 없는데 그녀는 그 길을 고집한다. 제사는 그녀의 종교 같다. 그녀가 스스로 택한 계획이자 대응이다.
제사가 있던 날도 아이들은 시부모님 집 소파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작은 컴퓨터와 TV 같은 전화기를 붙잡고, 첫째는 게임과 관련 영상에 빠져있었고 둘째는 캡컷 편집에 취해있었다. 제사를 마치고 상을 치울 때쯤 시모는 아이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할머니도 상차림이 고생스럽지만, 너희들 좋아하는 전도 굽고 다른 식구들 먹을거리도 싸주고 이게 할머니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인내하며 했다고. 하고 나니 뿌듯하다고.
편하고 놀기만 하면 그게 어디 사는 거냐고.
그러니까. 스스로 계획도 하고, 실패도 하고, 고생고생 대응도 하고, 그래야 사는 거지. 편안하게 가만히 앉아 놀고먹으면 그게 사는 것 같겠냐고. 거기 어떻게 생동감 있겠냐고. 힙과 바이브가 어떻게 있겠냐고... 시모의 그 한 마디가 존의 말과 너무 닮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렇게 적어두고 기억하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돌아온건가.
계획도 대응도. 꿈도 고생도.
시시콜콜하지만 살아있음의 증거로 퉁친다.
오늘. 아침, 식사 메뉴를 계획하고 실수하고 대응하며 완성하고. 점심, 아이와 핸드폰 시간과 숙제 시간 설정에 대해 실랑이하고 나름의 대안을 또 세우고. 저녁, 이렇게 대응하는 글쓰기를 하며. 삶의 바이브를 느끼고 있다고 하면. 너무 진부한가.
내일.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내년 사업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팍팍한 자금 흐름에 대응할 것이 예상되는 것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작위적인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