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못되게 변해버린 마법사가 있었어. 굉장히 나쁜 마법사였지. 아주아주. 그 이름은...”
해그리드는 침을 꿀꺽 삼켰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좋아. 볼드모트야.”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냥터지기인 해그리드는 해리포터에게 볼드모트의 이름을 가까스로 일러준다. 그리고 해리포터가 사는 마법세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볼드모트다.
파울센의 ‘공허노동’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그런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말일 것이다.
“너의 일이 무의미한 노동은 아니니?”
책의 저자는 이미 프롤로그에서부터 말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일이 무의미한 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금기이기 때문에.... 롤란드 파울센의 책 ‘공허노동’에 대해서 정치권의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20p)
내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맞아요, 난 중요한 일을 하는 게 없어요”그렇게 말한다면 나의 가치는 하락할 게 분명한데. 단지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껴도 그냥 계속해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 설명한다.
가짜노동(볼드모트)이라고 말하자
이 책의 저자는 해리포터처럼 볼드모트를 입 밖으로 명확하게 외친다. 중요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에게서 얻은 결론에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보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공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공론화시켜서 무의미한 노동을 유의미한 노동으로 탈바꿈하고자 저자는 노력을 쏟아부었다.
“파울센에 따르면 직원은 할 일이 없고 상사는 일거리를 찾아주지 못할 때,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양쪽에게 최선인 상황이 되어버린다”(79P) 그러므로 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가짜노동을 하고 있노라면 그 누구도 그 상황을 비판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반복된다. “가짜노동은 그냥 텅 빈 노동이 아니다.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노동, 노동과 유사한(하지만 노동은 아닌) 활동, 무의미한 업무다... 또한 뭔가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지길 바랐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도 지칭한다.(96p)”
헛짓거리노동. 과격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마음에 박혔다.
연구의 쓸모와 가짜노동
“그러면, 네 연구의 쓸모는 뭔데?”라는 말을 들었던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의 글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중앙일보, 2024년 7월 25일 김상현의 과학상책코너 ‘호기심의 쓸모’)
가짜노동을 읽어서였다. 김상현 교수는 이 질문을 듣고 머리에 전류가 흘렀고 여러 사람의 금언이 하나의 회로에서 불을 밝혔다고 했다. ‘연구’에 관한 내용으로 끝났으나 ‘가짜노동’을 읽은 나로서는 ‘노동’으로 생각이 연장됐다.
기준과 규격은 누가 만들었는가
쓸모의 기준은 무엇인가. 가짜 노동과 진짜 노동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짜와 진짜는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의 견해는 온전한가. 마치 온통 질문의 연속이었다. 그 질문은 책 속의 테크널러지로 확장됐다. 공인인증서 하나를 깔기 위해 처음부터 행해야 하는 많은 프로그램 다운로드와 인증절차가 바로 더 많은 노동을 창출한 것으로 분류됐다. “테크놀러지는 스스로 영원히 계속되려는 성향이 있다(106p)”
나와 가정에 더 집중하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규정하는 노동의 기준은 시간에 비례한 노동의 대가였다. 문제는 노동의 임금이 시간으로 측정된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면서 회사 내에서도 패가 갈라진다. 앞으로는 짧은 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긴 업무시간 중에 실제로 우리가 일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수치로 나타내 보였다. 집중해서 짧은 시간 처리하는 일이 회사와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 회사는 직원들이 할 일이 없어 만드는 헛짓거리노동으로 인한 또 다른 헛짓거리노동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있다. 직원들은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 외에 자신과 가정에 투자하는 시간을 늘려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어느 사회과학 교수는 동료들과 만든 연구 모델이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고 인정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그럼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대놓고 물었다. 그는 가족도 부양해야 하고 집세도 내야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 점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그 교수가 자존감을 잃을까 봐 걱정됐다.(389p)”
존버(존나 버티다)가 승리자!라는 말이 지금도 통용되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부모님도 우리를 그렇게 키워왔었고 아직 내 주변도 그게 맞다는 논리가 이어졌다. 외벌이라면 회사를 그만둘 이유를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맞벌이라면 다를 수 있다고 독서회 회원이 말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우리는 가짜노동을 인정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었다.
진짜노동과 가짜노동이 과연 무엇인가
진짜 노동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해 최근에 나온 신작 “진짜 노동”을 빌렸으나 결국은 꾸역꾸역 100페이지를 읽다가 손을 놓았다. 오늘까지 반납해야 하는 마감일에 치였고,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또 독서회 회원들에게 잘난척하기 위해서 속편을 읽어야 한다는 그 ‘가짜 노동’에 내가 지쳤다.
‘진짜 노동’의 책이 나를 ‘가짜 노동’시켰다.
결국은 돌고 돌아 마음의 문제였다.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임을. 내가 MBTI 검사에서 E형이었다가 I로 변하기도 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