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면 됐다

20250513 딸의 전교회장 당선, 축하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다

by 끼우

점심이 되자 요란한 외침이 축구장을 맴돌았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랐지만 실은 21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었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날 어느 당의 키워드는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문구. 맞다. 우리 딸의 전교 회장 선거 문구였다. 2개월 전의 얇아진 기억의 끈을 다시 붙들고 싶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

6학년이 되자마자 반 친구들과 친해지기도, 새 학기에 적응하기도 전에, 전교 회장 선거가 먼저였다. 선거 날이 3월 12일이었다. 전교회장은 어딜 가도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 우리 아이들은 전교임원을 하지 않도록 바랐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방송반이 되길 엄마인 나는 원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면 인생은 재미가 없다.


전화위복

아이는 5학년 때 방송반에서 떨어졌다. 방송반에 뽑히면 6학년 전교 임원이 될 수 없다는 규칙에 따라 딸은 전교 임원 선거에 나갈 수 있었다. 울며불며 속상해했던 딸은 전화위복의 계기로 경쟁자(방송반에 붙은 아이들)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왜 같은 반에 둘이나

그렇다고 마냥 쉬운 선거 여정은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6학년 중 전교남자회장 한 명과 전교여자회장 한 명, 5학년 중 전교남자부회장 한 명과 전교여자부회장 한 명, 총 네 명의 전교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5년 이번 전교여자회장 후보에는 총 네 명이 올라왔는데 하필이면 같은 반 여자 친구가 함께 전교회장후보로 올라와 같은 반 친구들에게 표를 다 받을 수도 없었다.



혼란의 시기에는 영웅이 나타나는 법

하지만 이럴 때면 언제든 영웅이 나타나기도 하듯, 딸에게는 동생들이 구원투수였다. 전교임원은 고학년(4,5,6학년)들에게 투표권이 있다. 둘째는 4학년이 되어서 전교임원선거를 처음 치렀다. 은근히 반 친구들에게 자신의 누나를 뽑으라고 선거운동 아닌 선거운동을 했다. 그래서 딸은 4학년의 표를 많이 받았다.



딸의 공약이 아닌 엄마가 만든 공약

사실 딸의 공약은 내가 다 검색해서 찾은 몇 가지들 중에서 선택해 보라고 했던 예시들이었다. 딸이 마음에 드는 공약을 찾아보라고 했어야 했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학원가기도 바빠서 넉넉한 시간을 가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엄마인 내가 혼자 판단을 했다. 그런 촉박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엄마가 잘 찾은 공약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학원을 다 빼서라도 아이에게 많은 것을 맡겼어야 했다.



딸은 독립을 원했다

그래서인지 딸은 당선이 되고 나서도 내가 직접 만든 공약이 아니고 엄마가 해준 공약이라고 속상해했다. 자신은 마마걸이라고 엄마 말 잘 듣는 아이가 맞는 거냐며 나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해줘야 하고 어디서 기다려서 아이를 봐줘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사춘기가 된 딸이 독립적으로 자아를 찾는 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다.



회장님은 내가 아니라고요

이런 고민에 싸여있음에도 주변 사람들은 손을 모아서 “회장님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축하받을 사람은 딸인데 내가 축하를 받는 모양새란. 이러려고 내가 공약도 써주고 개입을 많이 한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 함께 파도처럼 밀려온다. 딸은 나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나는 이제 조금 떨어져서 아이를 바라봐야 한다. 많은 관심에 대한 표현은 조금만 하도록 하고 마음에 묻어두자. 이제는 멀어질 때다.



막내의 자부심

임원 선거가 끝나고 막내가 말했다.

“엄마 있잖아. 우리 반 한 친구가 손을 들고 발표했어. ‘저희 형은 이번에 전교회장이 되었습니다’라고. 그래서 나도 뒤이어 손을 들었어. ‘저희 누나도 이번에 전교회장이 되었습니다’라고.” (공교롭게도 남녀 전교회장 각각의 동생 두 명이 같은 반에 속해있었다;;;)


그래 막내가 그렇게 누나가 자랑스럽다면 누나의 전교 회장은 그걸로 된 거다. 동생들에게 대단함을 느끼게 해 준 거라면 말이다. 그렇게 둘째도 학급 남자회장, 셋째도 방과 후 배드민턴 반장이 되었다. 뭘 더 바랄 게 있나.

그거면 됐다.



ps. 아이는 공약을 지키려 부단히 노력 중이다.

양심 우산 공약으로 학교 예산안에서 학교 로고가 새겨진 우산을 사 배치했고 아이가 관리 중이다. 물론 24개 중 지금 남아 있는 우산은 고작 7개뿐이다.

그 건너편으로 급식 건의함이 있는데 한 달에 급식 건의 종이를 모아 많이 나온 의견들 순으로 정리해 영양사 선생님께 가져다 드린다. 지난(3~4월) 급식 건의로 5월 중 하루는 아이들이 원하는 급식의 날로 완전하게 배식되었고 그중에서 구슬아이스크림이 아이들을 흡족하게 했다. 아이가 세표차이로 당선이 되었는데, 발끝까지 쫓아온 다른 후보의 공약이 구슬아이스크림이었다.


휴. 열심히 지키고 있어 고마워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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