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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 빈 Sohnbin Nov 02. 2022

Galleria 색깔

west 1층에서 시작한 독창적 콘셉트의 소 역사

갤러리아의 현재는 과거의 신선한 시도가 바탕이 되어 이룬 일이다.

갤러리아로 명칭을 바꾸고 새로운 이미지에 맞춰 경쟁력 있는 백화점을 만드는데 큰 구실을 한 

90년 초반의 일은

1층 잡화 매장의 변신에서 비롯된다.

당시는 소위 구두 3사에 유통업체가 리드 당하는 소위 셀러스 마켓이었다.

그 와중에 1급 금강제화 매장은 없었고 에스콰이아 엘칸토만 적은 수수료로 임대을 (준 임대) 매장을 타사에 비해 작은 규모로 운영 중이었고, 수수료도 가장 낮았다. 걸핏하면 철수하겠다고 얼음장을 놓고 추석, 설날 시기에는 으레 상당한 량의 구두티켓을 판매해주는 것이 관행이 이었다.

이때 과감히 두 매장을 철수하라고 했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본부장 이하 임원 등은 질책하고 관계 회복을 통해 잘 유지하라고 난리가 아니었다.

억지를 부리듯 내가 책임지고 나은 매장을 만들겠다고 고집을 피워 결국 철수시키고 우리만의 개성을 가진 매장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소신껏 진행했다.

그 중심 복안은 핸드 메이드의 맞춤형 슈즈를 위한 살롱화 매장으로 변신 특화시키는 일이고 잡화가 기능적으로 분리한 개념인데 잡화는 패션의 일환으로 의류와 연결성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므로 여성복에 어울리는 액세서리 개념으로 의류의 소재나 칼라, 스타일의 변화에 주목하여 그에 적합하게 조화되는 액세서리를 종합적으로 갖춰서 토털 잡화 매장을 전개했다. 이에는 기존 잡화 업체의 한계를 알고 있으므로 여성복 중에 이런 시도를 하고 있는 이신우 컬렉션, 신원 에벤에셀의 세스띠, 에스프리, 그리고 잡화에서 이를 눈여겨보고 기회를 달라고 한 쌈지(지금까지 잡화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핸드백 전무업체), NFX20(획기적 시도로 뉴 트렌드를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킨) 등이 매장의 중심이 되었다.

피혁 존의 살롱화 매장은 각 브랜드가 당시에 1억을 상회하는 매출을 올려서 전 슈즈 회사들의 입점 경쟁이 치열했다.

우수한 판매직원들이 우선 투입되고 기성화도 변형해주고 개별 맞춤도 해주는 신선한 콘셉트이었고 당시 상품의 피드백이나 오더의 공급이 며칠 내로 이뤄질 정도로 뜨거운 매장이 되었다. 당연히 매출에 따른 수수료도 기존 제화 3사와 거래했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최근까지 이들 군은 각자 

내셔널 브랜드 군의 탑으로 진입할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사장, 상무 심지어 조폭 등등 입점을 위한 집요한 로비와 압력이 있었지만 하나 흐트러짐 없이 

제품의 디자인, 트렌드, 완성도와 서비스 능력으로만 평가해서 유지했다.

한편 토털 잡화의 개념은 백화점의 기능과 용도별 상품 구성을 패션의 경향과 코디네이션을 중심으로 구성의 주제의식을 변환시키는 작업이었고 기존 백화점과 확고한 차별화를  만든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이후 잡화, 특히 백화점 1층에 대해서는 전체 백화점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고 우리 팀 직원들은 더 이상 타사 백화점의 시장조사를 시키지 않았고 의류 층을 자주 둘러보며 패션  트렌드를 이해하도록 했다.

백화점의 태동 이후 각 층별 구성은 대체로 소비자에게 익숙하게 존재해왔다.

패션의 일부로 종합적인 고려는 배제되고 목적성을 띠고 경험으로 수용된 장소를 방문하는 방식, 곧 단골의 경험이 우월하게 유지되고 일시적 방문자로 하여금 이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은 소외감을 자극하는 

방식이 의지적이지 않더라도 공유하는 소비 체제였다.

익숙한 경험 체계를 바꾸는 일은 용이하지 않지만 갤러리아의 위치적 특성은 소비자들의 해외 경험과 우월적 의식, 새로운 상품에 대한 수용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되기도 해서 새로운 시도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 지역 소비자들은 그 시절부터 해외 유학이나 거주 경험이 많았고 아직 국내에 도입되기 전의 

소소한 캐주얼 브랜드군 갭, 바나나 리퍼브릭 류가 상징성을 지니기도 했다.

부단한 조사가 필요한 일이었고 그 경험을 가진 패션 관계인의 정보를 존중하며 선구적 소비자층을 위한 서비스 개발에 앞선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시도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트렌드 생산과 발신지로써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매장의 구성을 변화시키면서 매장을 표현하는 집기나 디스플레이, 곧 VMD에 대한 급진적 시도를 위해 공감대를 만드는 작업은 수익과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라 설득과 계획에 많은 저항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나 다움, 나 자신의 시도가 신선하고 나를 잘 표현하는 방식이며 처음 시도하는 무엇이길 바라는 마음이 일생의 지향점이어서 숙고가 필요했다. 당시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일에 기존 경험에 익숙한 조직원들은 의 견을 내는데 어려워해서 아이디어 구현에 고심해야 했지만 생존으로 독창적인 길을 숙명으로 여기고 모든 책임을 안고 가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실제 소비자학을 전공한 신입사원에게 입구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입장하는 고객의 인구 통계적 특성을 

체크해 보라고 한 정도도 이 필드에서 당연한 시도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조경란의 소설 백화점에서 묘사한 글이 소비자 관점이면 나의 시선은 무대 연출가의 시점이다.

막을 올리기 전에 분주한 물상들이 어느새 화려한 조명 아래 제자리 하고 관계인인 매장 관리, 판매자들의 의식과 서비스라는 이름 아래 소비자와의 쟁투가 숨겨있는 곳의 매력은 욕망의 현실감이다.

막연한 욕구와 니즈가 구체화되고 점점 가능할 거라는 충동질을 참는 자와 부추기는 자의 끊임없는 교유, 점잖은 얼굴을 하고 가면극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으로 스스로 그 쟁투 속에서 문화적인 사명으로 포장한 거창한 목적을 화두로 삼도록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는 곳이다.

점점 사람의 촉수와  감각기관을 모조리 자극하고 관통시키려는 노력은 빛과 어둠이기도 하고 

초점의 부각이기도 하다.

내게는 욕구의 절제를 극대화시키는 초인으로 존재하고 싶은 나의 의지의 장이었다. 물질에 

휘둘리지 않는 현장, 그럴수록 외로운 고도의 사나이가 되고자 했다.

이곳에 거래하는 소위 벤더 업체들의 경우 직원들과 입점 교섭을 하는 동안 매우 힘들어 했다.

자신들의 준비가 부족하한경우도 있거니와 판단하는 측의 판단유보나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에 

당할 때 생업인 그들에겐 속 긇는 순간이다.

가능하면 일차적 상담이나 판단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지만 허탈하게 돌아가는 업체들을 발견할 때 

위로 겸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다수의 업체가 발탁된 경우가 있는데 즉시 판단 가능한 일을 반복 미팅하게 하는 일은 옳지 않다. 

기실 한번 면담과 상품 관찰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쩌면 부정적으로 본다면 선택자의 우월적 지위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시절 소위 바이어는 찾아오는 업체들 만나기도 바쁘고 그것의 선택의 폭도 넓으니 

소비자 니즈나 생활자로서 연구대상을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 약했다.

실제 대형 유통업체가 우월적 지위에 있는 바이어스 마켓이라 그 대표적 업태인 백화점은 신규입점이나 거래 유지를 위한 판단의 합리적 고려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규모가 클수록 실험적이거나 다소 모험적 상품의 취급에 소극적이고 여타 업체의 거래 실적을 참고해서 안정적인 결과를 보고 도입하는 경향을 보였다.층별 구성이나 배치의 방법이 

기존 질서나 습관에 의존하는 경향이고 새로운 시도는 실패의 우려가 있으니 

그 당시 상황으로 잘 가고 있는데 그런 위험상황에 들어갈 의도가 무의미했다.

나만의 색깔과 방법을 고집하고 그런 의미가 없으면 재미가 없어하는 성향이라 색다른 세계를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실질적으로 성과를 만들어냈다.

내부적으로 그룹 공채를 통한 신입사원의 변화가 오면서 여사원의 비중이 증가했다. 

각 팀별로 배치해서 실무 현장 교육을 시키고 나면 배치를 하는데 서로 배제하려는 분위기라 

본부장은 오픈 마인드가 된 나에게 타부서 직원까지 수용하도록 했다. 

당시까지 늦은 밤의 매장 변화와 임시 매장 배치가 매일 이뤄지는 편이라 여직원의 경우 

다소간 전력에 결함이 생긴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기술한대로 소비자학과 출신의 여사원에게 출입구에서 내방 고객의 프로필 조사를 시켰다. 

사회학의 조사방법론에서 기초이지만 현장 조사를 통해 실제 고객의 인구 통계적 분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고 외양으로 보이는 패션의 경향성을 분류해 보기로 한 것이다.

멀리서 일정 간격으로 방문하는 고객의 외양 사진을 찍어보고. 나아가 백화점 앞 거리에서 통행객을 

촬영해보니 분류 가능한 군집이 생겼다.

늘 추상적인 묘사로 타겟을 설정하다 현실과 일치시켜보는 행위는 새로운 자각이 생긴 것이다.

당시의 직장분위기는 남녀간 성별 차별이 심하고 

사회 여건도 인권에 관한 세세한 의식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다시 매장의 변화로 들어가면 잡화는 성별, 소재별, 용도별로 구분하여 매장을 나누는 통요된 룰이 존재했다. 이는 익수한 고객과의 약속이고 편의성 담보였다. 이런 흐름 속에 새로운 1층 매장의 모습은 불가능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조닝이 어려우면 집기라도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으로 만들어 혁신을 실현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디자인 업체에게 아이디어를 주며 공동개발 했다. 이에는 많은 해외 자료를 참고하였고 

일본의 경우 현장 조사를 다양하게 했다.

아울러 매장의 동선과 조닝을 새롭게 구성 했다. 이럴 경우 고객 접근성의 용이성에 따라 선호하는 위치가 있어서 누구나 수긍하는 기준을 정립하고 이해하도록 하면서 낮은 선호 위치는 

매출이 예상을 뛰어 넘도록 설계하고 주의 집중을 가져오도록 했다.

의류 존에서 이해가 안된 상태인 스톰 오브 런던, 클럽 모나코 같은 수입 토탈 브랜드를 과감히 도입하고 이후 MCM 운영자인 김성주씨의 제안을 수용 갤러리라파예트 PB 상품매장을 함께 연결해서 

매장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기능과 용도 중심에서 패션 환경과 수용성 중심으로 

잡화를 패션의 중요 부문으로 녹아내려한 일이다.

바야흐로 백화점 1층의 모습이 혁명적으로 바뀌고 점 백화점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살롱화는 다투어 입점하고자 압력과 회유가 넘쳤고 이에는 단호히 거부했다.

사장과 본부장의 지시에도 철저히 배격한 일로 협박도 많았으나 그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편법으로 입점 브랜드를 매입하여 들어오고자 했던 모 브랜드는 과감히 정리했으니 

언제나 나의 원칙은 분명했고 고용관계의 직원이라는 신분은 

“나의 결정이 곧 회사의 결정이다”라는 자부심과 고집으로 연연하지 않았고 

늘 다음 직급으로 승진하기 전에 퇴직하고 다른 길을 가겠다는 생각을 되새겼다.

모든 아이템에 대한 상담이 단순한 갑의 위치에서 수월한 판단이 아니라 생업으로써 운영수익이 날 수 있는지? 소비자의 관심과 유익함을 주는 특징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기 되고 이 점은 상대편에서 역지사지하면서 그들의 생업을 존중하고 실패하지 않게 하는 과정이다. 나 자신의 유익함만 요구하는 게 아니고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바탕이 돼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때문에 설득력이 있으며 수긍하는 전제가 되고 

공정함을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다.

관이나 공공 기관이 아님에도 사회적 공공성을 앞에 내세운 과정이다.

대체로 사기업은 오너가 맘대로 한다는 의식이 팽배한데 그 가운데 주요 판단요소를 중심으로 합리적 결정이 이뤄지면 일상사 전 분야에 걸쳐 공정한 게임의 룰이 기본이 될 터다. 

굳이 사적 영역의 임의성을 자유롭게 인정하다보면 부정과 불합리는 발붙이기 어려울 터인데 

사람살이가 그러하지 못하다.

이 시기 패션사업의 쥬요 월간지인 패션비즈는 나의 잡화부문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관심이 지대했다. 

게다가 당시 팽배한 부조리에서 벗어나 합리적 운영체계를 지닌 것도 주목의 대상이었고 

그 결과의 성과도 괄목상대였다.

아울러 동종 업계에서도 시장조사와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었으며 우리 팀원들은 더 이상 타사를 조사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 자부심이 현재의 갤러리아 위상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단 한번도 명절에 유행하던 구두 티켓 사전 판매 강요는 나의 운영방식에 반하는 것이라 전체 팀에 요구한 결과에서 성적이 좋을 수 없었다. 소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업체나 개인에게 제공하는 수준이었으니

이와 함께 클럽 모나코는 좋은 실적을 보였으나 의류팀이 탐을 내니 기꺼이 올려 보냈다. 

오고감의 자유, 가는자 막지 않고 오는 자도 마다 않겠다는 개방성이 나의 중심 가치였다. 

실로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정된 성과에 여유를 가질 무렵 회사의 새로운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베르사체,버버리,에트로 정도의 허울 뿐인 명품관을 맡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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