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도서선정단 I차 대상 도서 독서 후기 및 평가
0.
소설은 충분히 흥미롭다.
각가 김진영은 이전 작품인 『마당이 있는 집』에서 예리한 심리 묘사와 치밀하게 구축된 미스터리 구조를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신작 『괴물, 용혜』에서도 그는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독자로 하여금 김진영 소설이 기대하게 만드는 감각적 글쓰기를 다시금 확인시킨다.
물론 장르소설이 지닌 보편성의 한계 즉 독자층의 저변 확대가 쉽지 않다는 구조적 특성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는 특정 장르가 갖는 선호의 편차 때문이지 작품성의 결핍 때문은 아니다.
2021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지옥>이 보여준 현상도 이를 상기시킨다. 당시 그 인기는 말 그대로 센세이셔널했고, 그 여세를 몰아 2024년 말 시즌2가 방영되기도 했다. 화제성을 확인하기 위해 시청하기도 했지만, 정작 내 주변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미지근했다. “왜 저런 걸 만들지?”라는 질문이 여러 입에서 흘러왔었다.
장르적 과장과 극적 설정이 특정 계층의 거부감으로 인한 충돌로 생기는 특유의 균열이었다고 할까.
물론 미스터리나 판타지적 요소를 필요로 하는 순간은 분명 있다. 자극적 소재와 긴장감 있는 서사를 원하는 독자층이 존재하고, 작가가 그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이는 나와 같은 독자가 선호하지 않을 뿐, 장르 자체의 가치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사람들은 왜 ‘변신’ 이야기에 그토록 끌리는가?
괴물로의 변형, 인간성의 균열, 존재의 경계가 뒤틀리는 순간들을 왜 사랑하는가?
그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1.
김진영 작가의 『괴물, 용혜』는 미스터리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심층에서는 인간의 윤리적 실재와 현대 사회가 내면화한 구조적 폭력에 대한 첨예한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특히 주인공 용혜가 겪는 신체적 변이 즉, 온몸을 뒤덮은 붉은 반점, 생고기 혹은 식인에 가까운 충동을 향한 기이한 식성은 이 작품을 고대 신화의 변신 모티프와 교차시키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고대 신화, 이를테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변신은 신의 분노나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징벌’이라는 구조를 따른다. 변신은 죄를 지은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강등시키기 위한 신적 의지의 발현이며, 그 자체로 의도적·규범적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나 『괴물, 용혜』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신체적 변이는 신적 개입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서서히 드러나듯, 그들의 변이는 산업 독소와 환경오염이라는 현대 사회의 비가시적 폭력의 결과로 기인했음을 추정케 한다.
봉준호의 영화 『괴물』이나, 일본 영화 『고지라』와 김진영의 소설 『괴물, 용혜』는 그 변신의 근원에 환경오염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스스로는 원치 않았으나 외부적 요인에 의해 괴물화된 대상이 되어버린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한 타자성은 작품 속 서사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다.
경찰 홍보팀이 의뢰한 〈실종〉이란 영상물은 경찰의 날 행사장에서 상영될 한 시간짜리 홍보 다큐멘터리였다.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이 아닌,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드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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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의도가 아닌 변신, 즉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타자적 신체로 밀려나는 변이는 인간이 자연과 사회적 시스템 사이에서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괴물성의 기원을 윤리적 결함이 아닌 환경적·구조적 요인으로 재배열한다. 이는 변신을 도덕적 처벌로 이해하던 전통적 신화 구조를 전복하며, 현대 사회가 생산하는 비가시적 폭력의 윤리적 책임을 되묻는 장치로 기능한다.
더 나아가, 강제된 변이 속에서도 용혜 등이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고투와, 그들을 바라보는 ‘평범한’ 인간들의 반응은 인간성과 괴물성의 경계가 더 이상 외형의 문제일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결국 이 작품은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것이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타자를 대하는 태도와 공동체가 행사하는 윤리적 선택이라는 사실을 조용하면서도 날카롭게 제시한다.
2.
주인공 용혜의 신체 변이는 단순한 설정적 장치가 아니라, 사회가 배출한 유해 물질이 개인에게 강제적(구조적, 폭력적)으로 부과한 존재론적 변이 상태(괴물)로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은 용혜의 붉은 반점과 비정상적 식성이 화학회사의 독성물질 노출과 그로 인한 피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서서히 드러낸다.
여섯 명은 두 시간에 걸쳐 폐수 처리를 완료했다.
그리고 기숙사 309호에서는 그날 밤 내내 몸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부터 다섯 명은 피부가 심하게 따끔거리는 통증과 머리가 터질 듯한 두통에 시달렸다. (중략)
다섯 명의 몸에는 붉은 반점이 생겨났다. 식습관에도 변화가 생겼다. (245쪽)
이러한 배경 설정은 용혜의 괴물성이 고전 서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도덕적 실패나 신적 징벌의 결과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는 오만함을 벌 받는 영웅도, 금기를 어긴 채 신의 노여움을 산 인간도 아니다. 오히려 산업적 탐욕과 기업의 무책임이 만들어낸 독성 환경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포 단위로 변형된 신체를 부여받은 현대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희생자인 것이다.
김진영은 용혜 등의 변이를 통해 ‘괴물화’의 원인을 인간 개인의 윤리적 결함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생산한 폭력의 결과로 재배치한다. 이로써 작품은 괴물성이란 무엇인가, 누가 괴물인가라는 질문을 독자 앞에 날카롭게 제시한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성서의 욥기를 인용한 것은 무척이나 인상적인 설정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디에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했습니다. "땅에서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다 왔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 욥을 유심히 살펴보았느냐? 땅 위에 그런 사람이 없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한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이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했습니다.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께서 그와 그 집안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의 사면에 울타리를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주께서 욥이 손대는 일에 복을 주셔서 그 가축이 땅에서 늘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손을 뻗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쳐 보십시오. 그러면 그가 분명 주의 얼굴에 대고 저주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그의 모든 재산을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손가락 하나도 대지 마라" 하시니 사탄이 여호와 앞에서 물러났습니다.
(욥기 1장 7-12절, 우리말성경) (소설 139쪽)
욥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과 사탄의 ‘게임’이라 불릴 만한 초월적 시험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결국에는 생명의 위협까지 마주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의 주변 인물들인 아내와 친구들은 이러한 재난을 두고 “네가 죄를 지었기에 신이 벌을 내린 것이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압박하며, 비극의 원인을 욥 개인에게 귀속시키려 한다.
이와 같은 낙인 구조는 『괴물, 용혜』에서 용혜를 비롯한 ‘괴물화된’ 인물들이 겪는 사회적 처지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이는 결코 우연적 유사성이 아니라, 작가가 의식적으로 참조했을 가능성이 충분한 서사적 모티브이기도 하다.
3.
용혜 등에게 가해진 위해를 보자.
그들 모두에게 나타나는 붉은 반점은 독성 화학물질이 체내에 새겨놓은 물리적 낙인이며,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비인간적 존재로 분류되도록 강제하는 구조적 폭력의 표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의 결말에서 이 반점을 괴물화의 징표에서 새로운 인간성의 변형된 모습으로 재해석하는 반전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 상징은 욥이 신의 개입으로 온몸에 악성 종기를 얻었던 상황과도 의미 있게 오버랩된다. 욥의 종기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신적 시험의 흔적이자 사회적 오해의 근거가 되었고, 성서는 그의 회복을 기록하면서도 그 종기가 실제로 나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마찬가지로 용혜의 붉은 반점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괴물성의 흔적’이 단순히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로 남아 인간성의 새로운 층위를 구성하게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사탄은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 욥을 그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악성 종기가 나도록 쳤습니다. (욥기 2:7)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용혜도 석중의 시신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온몸이 간질간질했고 붉은 반점이 제각각 날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전신의 세포들이 '먹어!'라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267쪽)
생고기, 더 나아가 식인을 향한 충동은 오염된 신체가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이성적 욕구를 감당하지 못할 때 표출되는 퇴행적 생존 본능으로 그려진다. 이는 화학적 파괴가 인간 정신의 최후 보루를 붕괴시킬 때 나타나는 행동적 결과이며, 앞서 언급했듯 용혜 등이 결코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즉, 외부의 구조적 폭력이 강요한 존재론적 변형의 한 양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충동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강제된 괴물화’의 생물학적·심리적 표출인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전통적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괴물성의 기원을 신적 질서나 초월적 징벌에서 인간 사회의 통제 실패와 산업적∙사회적 무책임으로 전이시킨다. 고전 신화나 성서에서 괴물화가 신의 분노, 규범 위반, 오만함에 대한 경고로 기능했다면, 『괴물, 용혜』에서의 변이는 철저하게 사회의 죄가 개인의 몸에 새겨진 결과인 것이다. 용혜의 괴물성은 그가 저지른 죄의 흔적이 아니라, 사회가 은폐하고 방치한 폭력의 물질적 귀결이며, 그 점에서 이 작품은 ‘괴물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윤리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재배열하는 것이다. (욥기의 서사 구조와 유사)
4.
반복되어 얘기하듯, 고대 신화에서 인간은 신적 질서를 위반했을 때 돌이나 동물, 혹은 무생물로 변형되는 존재론적 강등을 겪는다. 이 변신은 단순한 형상 변화가 아니라, 신의 질서에 도전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도적 처벌이며, 괴물성 역시 신적 규율에서 이탈한 데 대한 명확하고 계획된 징벌의 결과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괴물, 용혜』는 이러한 고전적 변신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전복한다. 용혜의 괴물화는 그의 의지나 도덕적 선택과는 전혀 무관하게, 산업적 유해 물질에 노출된 결과로 발생한 비자발적 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혜는 신화 속 변신된 존재들처럼 이성과 주도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신체적 변이가 심화되는 와중에도 경찰로서의 직업적 책임과 타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끝까지 지키려 애쓴다.
용혜의 변이는 (욥기와 같은) 신의 의도된 심판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스스로 야기한 산업적 폭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그 형태적 변이를 넘어 연민·공감·정의감이라는 윤리적 에토스(태도)를 고스란히 유지한다. 이 점에서 작품은 괴물성을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신적 징벌이 아닌, 구조적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인간이 겪는 고통과 그 속에서 발휘되는 저항의 윤리로 재정의한다.
5.
『괴물, 용혜』의 서사적 힘은 신체적 변이를 겪은 용혜가 도덕적으로는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고 성실한 경찰로 그려지는 반면, 외형적으로 ‘정상’의 범주에 속한 이들이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도덕적 괴물성을 드러내는 데서 비롯된다.
지역 사회에서 봉사 활동을 통해 명망을 쌓아온 목사 부부가 정작 자신의 여덟 살 딸의 유괴를 사실상 방조한 위선을 드러내는 장면, 과거에는 뇌물을 거절했던 인물이 시간이 지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혹한 취조를 일삼는 경찰로 변질되어 가는 모습 등은 이러한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이들의 행위는 스스로 선택한 악의이며, 용혜 등이 겪는 수동적이고 강제된 신체 변이와 날카롭게 대립된다.
소설은 이 구조적 대비를 통해 괴물성이란 외형의 일탈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내면의 의도적 선택에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결국 이 작품에서 진정한 괴물은 자신의 ‘정상성’을 확신한 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인간들의 위선이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 곧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질문이 아니라, 독자의 내면 깊숙이 잠재한 괴물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도 하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6.
『괴물, 용혜』가 던지는 핵심 철학적 질문은 “괴물과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작품은 이 경계가 외형적 특징 즉, 붉은 반점이나 변이 된 신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윤리적 영역에 놓여 있음을 강하게 주장한다.
용혜의 변이는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징벌적·의도적 변신과 달리 철저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서 풍기는 ‘괴물 냄새’를 의식하면서도 사회적 낙인에 굴복하지 않고, 성실히 자신의 삶을 구축하려는 '능동적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독자는 용혜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회가 부과하는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한 그러한 시선을 자신은 어떻게 행사해 왔는지를 자연스레 성찰하게 된다.
이러한 서사는 괴물성이란 외부 요인에 의해 발생한 신체 변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다름을 혐오하고 단순화하여 괴물로 명명해 버리는 사회적 태도에서 비롯됨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괴물, 용혜』가 제시하는 괴물적 존재란 실제로는 존재론적 피해자이며, 진정한 괴물성은 외형만 ‘정상’의 범주에 속한 이들이 도덕적 감각을 상실한 채 행사하는 편견과 차별에 있다.
작품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를 향해 재차 묻는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그 질문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 더 나아가 우리 내면의 윤리적 상태를 비추는 거울로 작동하는 것 아닐까.
정리하자면...
김진영의 『괴물, 용혜』가 제시하는 괴물은 실상 외부의 적이나 신의 심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구축한 구조적 폭력과 무관심이 개인의 신체에 새겨놓은 비문이며,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비가시적 폭력의 잔혹한 표식이다. 그 결과 이 작품은 괴물성이 성문 밖, 즉 타자에게만 존재한다고 믿어온 통념을 해체하며, 오히려 정상성을 자처하는 이들의 내면 즉, 위선과 폭력을 방조하는 태도,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낙인 속에 진정한 괴물성이 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날카롭게 드러낸 작품이라고 하겠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은 분명 흥미롭다. 서사의 밀도도 높고, 현대 사회의 도덕적 균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주제 의식 역시 상당히 깊다. 다만 이 작품을 시민 독자들에게 추천할 것인가의 문제는 다소 유동적이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추천을 망설이게 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추천 도서로의 선정은 시의성과 독자의 필요, 그리고 작품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서적 파장까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현 단계에서는 ‘보류’ 의견이다. 잠정적으로는...
[참고]
◻︎ 선정을 위한 (임시) 도서평가점수 = 9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