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ㅣ 내가 시작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 분야에 대해 조금만 더 빨리 관심이 생겼더라면. 내가 어렸을 적에 이 분야가 활성화되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나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내가 부모를 잘 만나 여러가지를 경험할 수 있었더라면, 이 분야를 조금 더 빨리 찾았을까? 조금만 더 빨리. 조금만 더. 빨리.
새로운 분야를 찾아 떠난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특히, 저처럼 늦은 나이에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에요.
안녕하세요. 하제 입니다.
저는 2023년 올해로 30살이고, 6월부터 시행되는 만나이가 도입되면 2살이 줄어들어 28살이 되겠네요. 여러분들도 만나이를 사용하는 달이 오기를 바라고 있나요? 저는 한국나이로 앞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에 만나이를 사용하게 되면 설렐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요. 2023년이 되기 직전까지는요. 왜냐하면, 제가 올해부터 새로 뛰어든 분야에서 30대에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낯선 일이었고 아주 드문 예외의 인물로 낙인찍히기 쉽상이었거든요. 그 이유가 아니라면, 내가 30대든 40대든 20대든 10대든 신경쓰이지 않았어요. 타인들의 불편한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의 성장 순간을 목격했고 그게 또 행복했거든요.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요. 그러니까 나이는 정말로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뻔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어요. 단지 글자로 적혀있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 한 문장을 읽고 깨닫는 것과 몸으로 직접 뛰어들어 현장에 속해지면서 깨닫는 것은 꽤 다른 느낌을 주었어요.
내가 딱 30살이 되고 3개월이 지났을 때 뛰어든 분야는 '스트릿 춤'이었어요. 정확히 2023년 3월 2일에 시작했답니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5월27일 기준으로 87일째 되었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 뛰어들기 결정한 시기가 짐작되시나요? 아마도 <스우파>, <스뚝파>, <스맨파> 등등의 프로그램 영향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만, 그것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춤을 동경했던 첫 순간으로요. 그것은 10년 전쯤 고등학교 3학년때 일이었습니다. 내가 고등학생때만해도 '댄스부' 라는 명칭의 활동은 잘 없던 때 입니다. 댄스부는 커녕 밴드부 조차 있지 않은 따분한 인문계 학교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저 장점이라고는 평지에 위치한 학교였다는 것. 동아리라는 개념이 없던 학교였고, 특별활동으로 든 부서라고는 경제부였어요. 안하고 싶은데 무조건 하나는 선택해야했기 때문에 제일 인기없는 부서를 선택했습니다. 그만큼 나는 10대 청춘의 끝자락에서도 춤에는 관심이 단 1도 없었습니다. 수능을 끝내고 학예회를 했던 것 같은데, 그때 반별로 무조건 하나씩 나가야 했기에 우리반에서 활발하고 조금 노는 친구들이 나가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인기아이돌이었던 짐승돌의 아이콘 2PM의 <heartbeat> 를 춘다고 하더군요. 그때 나와 갑작스럽게 친해진, 꽤 인기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노는 친구들로부터 함께 학예회 무대에 서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 친구가 결정을 내렸을 때, 대답하러 혼자 가기 무섭다고 해서 내가 같이 가주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연습하던 빈교실은 5층이었고, 우린 5층을 향해 계단을 올랐어요. 그때 학교 엘레베이터 옆에 커다란 전신거울이 붙어있었는데 5층 거울 앞에 그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리더인 친구가 내 친구에게 "너 이 동작 따라해봐. 되면 같이 하자. 지금 대부분의 애들이 이게 안돼서 문제거든." 라고 했습니다. 내 친구가 따라해봤지만 몸이 마음먹은대로 움직이질 않았는지 나를 쳐다보면서 소리쳤습니다. "나 왜 이게 안돼!?"라고요. 당황한 내 친구가 나에게도 그 동작을 따라해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무생각도 부담도 없이 따라갔던 저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그 동작이 되었고 그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내 친구와 리더격의 친구는 나에게 무대에 설 것을 제안했지만 정말 춤에 1도 관심이 없던 저는 그 무대가 부담스러워서 거절해버렸어요. 그 거절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습니다. 당시 나는 춤과는 동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그후로 나는 종종 이 순간으로 돌아가 그 제안을 수락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28살이 될 때 까지도 춤학원을 다닐 생각을 못했습니다. 4년 내내 방학도 없이 수많은 실습과 연구와 쏟아지는 보고서들과 국가고시 시험이 휘몰아치는 대학생활을 하느라 바빴고, 졸업을 하기도 전에 덜컥 취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이때 10대 1 압박면접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합격전화를 받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누워 엉엉 울었습니다.) 그렇게 24살 무렵엔 전공을 살려 밥벌이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첫 직장에서 1년 조금 넘는 시간을, 생물학적으로 살아는 있지만 죽은 상태로 다녔습니다. 일은 제시간에 끝나는 법이 없었고 감사기간엔 수많은 서류철 파일을 싸들고 집으로 들고와 새벽4시까지 일을 하는 날들이 빈번했습니다. 회사와 집까지의 거리는 버스로 왕복 3시간이 걸렸고 정시 퇴근을 해도 저녁 8시면 나는 아직도 도로를 달리는 버스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울면서 퇴근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입맛이 없어 저녁을 생략하기 일수였고 침대에 누워서 조용히 눈물로 베개를 적셨습니다. 매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버스에 치이길, 횡단보도 너머 저기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이길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내 직종은 내원자를 대하는 일이었지만, 기타 컴퓨터 작업과 서류작업의 양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프린터실이 따로 있었는데 인쇄를 예약해두고 기다리다가 그곳에 있는 창문을 보면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습니다. 거기는 19층이었습니다. 그때 '아, 내가 지금 퇴사를 해야겠구나'라는 정상적인 생각이 들었어요. 곧바로 실행에 옮겼고 나는 퇴사당일 새벽6시에 퇴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내가 왜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의문을 가졌어요. 그후로 다양한 알바도 해보고 일반 회사에 취업도 해보고 직종을 바꿔보기도 하며 프로이직러로 살았어요. 중간중간 백수가 되는 기간에는 학원을 다녔습니다. 나는 배움에 목마른 사람이란걸 그때 깨달았어요. 나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된 사실이었습니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도, 한달마다 쥐어지는 급여도 아니란 것을요.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나 자신과 공적으로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28살이 끝나갈 무렵 댄스학원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댄스 학원에 냅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후로 퇴근하고 학원으로 뛰어가 일주일에 2번 케이팝 수업을 들었어요. 그마저도 코로나가 터져 수업이 중단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수강생이 단 2명일 때도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럼에도 만족스러웠어요. 댄스 학원을 다닌다는 사실 자체로도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댄스학원에 케이팝 말고도 다른 수업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원장님으로부터 다른 수업도 들어볼 것을 권유받았고 나는 여러종류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프리패스권을 끊었습니다. 나는 이때 내가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게 창피할 정도로요. 그당시 내가 추는 것은 춤이 아니였거든요.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시야가 조금 생겼습니다. 동작을 따라하는 것과 춤을 추는 것은 다르다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시야 말입니다. 그당시 나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종류의 수업을 들으면서 나의 움직임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요. 무엇때문에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들에겐 있고 나에겐 없는 것이였어요. '없다'라는 부재의 사실은 알았지만 그 부재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부재를 찾기위해서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 부재에 대한 생각을 하기 바빴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전문반 학생들임을 알게되었어요. 빠르게는 5살부터 늦게는 초등학교 5년부터 댄스학원을 다녔던 친구들이었어요. 그들이 나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지요. 내가 그들의 춤을 본건 그들이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이거나 이미 실용무용학과에 재학중인 전공 대학생들이었으니까요. 28살 끝자락에 춤을 접한 나와 그들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꽤 순수하고 순진한 면이 있다는 걸 스스로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연습하면 나에게 없는 그 정체모를 부재를 채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거든요. 이따끔씩 출근하기 직전 새벽에 연습실을 대여해서 춤을 연습한 후 출근하기 시작했어요. 회사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을 거절하고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야 빨리 먹어치우고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며 춤을 연습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거든요. 퇴근을 하면 댄스학원으로 달려가 저녁 10시까지 수업을 들었습니다. 이때도 나는 전문반이 아니였어요. 그저 여러수업을 들을 수 있는 수강권을 지닌 취미반 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나는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어요. 이때까지도 나는 전문적으로 춤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마 전문반 학생들 눈에는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들에게 '열정녀' 라고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거든요. 이 당시 상황을 적절한 표현으로 말해보라 한다면.. 간절함은 냄새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느끼지 못한 나의 간절함의 냄새를 그들이 맡아버렸어요. 그때부터 나는 나이만 많이 먹은 조롱거리로 전략해버렸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그들의 눈에 관찰되고 있었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 한장부터 내가 신발을 벗는 자세 하나까지. 그들은 내가 눈을 뜨는 방식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습니다. 내가 수업을 기다리느라 복도에 앉아있으면 부담스럽고 불편한 시선들이 쏟아졌습니다. 모른척 했지만 모를 수가 없었어요. 그들의 수근거림과 조롱거림을 내가 알아주길 바라는듯 했거든요. 주어는 없었지만 그 주어가 나라는 티를 많이 냈습니다. 그중에는 나를 싫어하는 티를 가장 많이 낸 전공생이 하나 있었어요. 나는 그녀가 이 조롱거림의 주최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케이팝 선생 직함을 갓 달은 전공생이었는데, 그 선생은 원장님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어요. 나는 처음에 사촌지간인 줄 알았습니다. 그만큼 전문반 사람들과 원장님들의 사이가 허물없이 가까웠어요. 원장님들은 30대 젊은 신혼부부였습니다. 그들이 집에 없음에도 그 수강생 혼자 그들의 집에 머무르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 수강생을 Y라고 칭하겠습니다.) 나는 원장님들과 나이차이가 적은 편에 속한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럴때마다 Y로부터 질투의 시선이 쏟아졌으므로 어렴풋이 질투와 욕심이 많은 친구구나 느꼈습니다. 그시선으로 출발한 분노 화살의 과녁대가 나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나는 Y의 케이팝 수업을 가장 오래들었기때문에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나는 그 선생님을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났지만 깍듯하게 선생님 호칭을 썼습니다. 한번도 말을 편하게 하지 않았어요. 그게 Y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참 순진하게 이 학원을 다녔습니다. Y를 마주치면 "선생님, 안녕하세요" 라며 인사를 먼저 건냈습니다. 대놓고 무시당하는 경우가 빈번했는데도 나는 Y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수업시간에도 대놓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선생님의 직함을 달고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럴거라고 여겼습니다. Y는 특히 어린친구들을 잘 대하지 못했어요. 자신의 말에 따라주지 않으면 이를 갈고 분노를 참는게 눈에 보였습니다. 그것은 어린이들도 느꼈을 것 입니다. 나는 그 어린이들이 수업을 탈주하지 않도록, Y가 수업하는 중간중간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양쪽을 챙기려 노력했습니다. 나의 전공스킬을 써가면서요. 어린 아이들일수록 소심한 경우가 많었어요.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친구들 위주로 챙겼어요. 그게 Y에게 찍히는 일인 줄도 모르면서요. 나는 수강생들과 Y가 갈등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이따끔씩 성인 수강생이 등장할때면 Y와 기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럴때면 원장님이 Y를 상담실로 불렀어요. 기싸움을 벌인 성인 수강생들이 원장님에게 컴플레인을 걸었던 것 입니다. 이것을 여러차례 목격하자 나는 Y가 안쓰러웠습니다. 그녀의 타고난 성격은 선생님이라는 역할과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었으니까요. Y는 남자원장님과도 복도에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네가 말을 그런식으로 하니까!", "제가 뭘 어쨌는데요?" 등의 언성높은 소리가 오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학원에 1년 정도 다니면서 알고싶지 않은 정보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어요. 전문반 수강생들로부터 비롯된 나의 조롱거림도 이 정보들에 포함되어있지요. 이 학원이 설립되던 초창기부터 다녔던 고인물 어린이들이 중고등학생을 거쳐 실용무용학과를 전공생이 되어 전문반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면 폐쇄적인 사람들로 가득찬 집단이었어요. 외부인을 견제하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 중 가장 먼저 외부인의 입장이 되었던 나는 그들 눈에 눈엣가시였음을 이해합니다. 그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그들에게 예의바른 인성을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들 중 몇몇은 케이팝과 같은 가벼운 수업의 선생 직함을 달게 되었지요. 그들은 선생님임과 동시에 수강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우에 불만이 있는듯 했어요. 언제나 모든 논란의 중심엔 Y가 꼭 끼어있었습니다. 나는 원장님들과 Y의 사이가 가족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때 알았어요. Y가 선생직함을 달게된 사람들을 한명씩 밀폐된 공간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어요. 그 공간만 유일하게 CCTV가 달리지 않은 공간이었어요. Y의 목소리는 언제나 컸기 때문에(특히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조롱할 때 가장 우렁찼습니다.) 무엇에 대해 뒷담을 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언니! 다른 학원에서는 이렇게 안한디! 우리 그거 돈 내고 수업 듣는 것도.." 복도를 지나가던 나와 Y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늘 못들은 척 했어요. 그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나를 조롱할 때 처럼요.
나의 물렁함을 알아차린 Y의 행동은 점점 대담해졌어요. 나를 좋아하던 몇몇의 전문반 입시반 친구들도 이제는 Y의 옆에 서서 나를 함께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때도 모른 척을 했어요. 그들 중에는 중고등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집단이 폐쇄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때부터 남자원장님도 그 조롱에 가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취미반과 전문반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수업도 있었지만 전문반만 들을 수 있는 수업과 취미반만 들을 수 있는 수업도 나뉘어 있었습니다. 나를 포함한 취미반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전문반 수업이 이어지는 요일이 될 때면, 전문반 수업 담당이던 남자원장님은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와~ 냄새봐라~ 애들아 조금 있다 들어가자! 하제 수업하고 나왔으니깐~ 이야 토하겠다~ "라고요. 그러면 남자원장님 주변에 모여있던 전문반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척 했습니다. 그들이 수업을 끝내고 취미반 수업이 이어질때면 그들의 땀냄새 또한 역겹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인성을 기대하지 않은 채로 다니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남자원장에게 달려가 말을 왜 그따위로 하냐고 따져묻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나는 남자원장님의 수업을 들은 적도 없었을 뿐더러 대화 한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그저 조롱할 대상자가 필요했을 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썰들을 나의 친구들이나 주변 언니들에게 들려줄 때면 그들은 식당 테이블을 엎을 기세로 화를 냈습니다. 이때의 나는 자신의 일처럼 화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걸로 충분했습니다.
여전히 내가 복도에서 수업을 기다리고 있을 때면 Y는 일부러 내 근처에 전문반 사람들을 모아댔습니다. 조롱거림에 시동을 걸기 위해서요. "눈을 존나 이상하게 뜬다니까? 똥그래져가지고! 수업할 때 함 봐봐! 진짜 존나 열받는다니까.", "말투 개패고 싶음.", "눈치를 존나 본다니까?","(내 말투를 흉내내며)슨생임, 재밌으요! 지가 잘할 때는 재밌고 지가 못하면 재미없는거임, 존나 웃긴다니까." 등.
나는 Y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내 의도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도로 와전될 수 있다는 것을요. 나는 Y가 유독 수업을 진행하기 힘들어하는 날이면, 수업이 끝나고 그녀에게 오늘 수업 정말 재밌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격려의 의도였는데 Y에게는 그런 나의 모습이 재수없어보였다는 것을요. 이때부터 나는 Y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내가 이 집단에서 영영 사라지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릴수록 더 그만두기 싫었습니다. 나는 강강약약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엔 꽤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내 주변에는 꼭 고약하고 못된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 붙었습니다. 인간의 추악한 본능을 마주하는 순간들을 많이 겪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도망가고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춤을 더 배우고싶었으니까요. 나에게는 그녀가 나를 싫어하고 모욕주는 것과 그녀의 수업을 듣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열정을 보인 순간들을 좋게 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대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10대 1 압박면접에 단번에 합격한 이유도 나의 멘탈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내가 그 면접에 합격한 후 인턴을 끝내고 정직원으로 전환되었을 때 나의 동기가 면접을 보러 왔었습니다. 나는 일을 하느라 그 친구의 면접에 대해 목격하거나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 친구가 집으로 돌아간 후 나의 동기들에게서 카톡이 빗발쳤습니다. 면접을 본 동기로부터 울면서 전화가 왔었다면서요.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합격한거냐고 물어보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동기는 6대1 면접이었고 나는 10대1 면접이지 않았냐고. 너는 진짜 전부터 느낀거지만 멘탈이 미쳤다 등등의 카톡이 이어졌습니다. 나의 멘탈과 인성에 대해 객관적인 지표가 될 만한 일화를 언급하자면, 대학교 4학년때 비밀투표로 진행된 과대를 뽑는 자리에서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과대 후보로 출마하지 않았는데도요. 굉장히 황당했던 순간이었습니다만, 교수님과 과학생들의 원만한 소통을 위해 열심히 했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내가 나의 멘탈적인 부분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침내 내가 이 학원에서 멘탈이 부너져내려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Y가 원하는 대로요. 내가 퇴근 후 수업시간에 맞춰 학원의 단단한 철문을 열면 문 앞에는 전문반 사람들이 모여서 나를 쳐다봤습니다. 꼭 내가 문을 열기만을 기다렸다는 것 처럼요. 싸한 정적이 나의 숨통을 조르는듯 했습니다. 복도는 두명이 나란히 걷지 못할 정도로 좁았기 때문에 그들이 비켜주지않으면 나는 짐을 놔둘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정색을 하며 나를 쳐다보았기 때문에 나는 애써 그들의 눈을 피했습니다. 먼저 비켜줄 기세가 아니였기때문에 나는 잠깐만요. 지나갈게요. 라는 말을 흘리며 그들을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이런 말들이 들려왔습니다. "야, Y야. 진짜네. 존나 웃긴다." "맞제? 내가 눈치 존나 본다고 했다이가." "왜저렇게 눈치 봐? 개웃긴다."
나는 이때 내가 곧 이곳에서 춤 배우기를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후로 Y가 학원에 없는 날이면 다른 전문반 수강생들과 남자원장님의 협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따끔씩 강의실 문을 열어둔 채로 수업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때면 전문반 수강생 몇명과 남자원장이 문에 서서 나를 대놓고 지켜보았습니다. "옷 개오타쿠같지 않아요?" 등의 말이 오가는게 들렸습니다. 그때 나는 검정색 티셔츠와 검정색 카고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때 나는 역설에 대해 배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수업에 제대로 집중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정말로 이곳에서 춤을 그만배워야하는 때가 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대로 그만두었을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