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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아빠 Jan 25. 2023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멋진 일'은 언젠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힘들었던 나의 대학시절. 아니, 대학시절이라기 보단 군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고된 순간마다 나를 위로했던 노래, 부활의 '네버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 이 노래를 들으며 이루지 못했던 고등학교 시절 첫 짝사랑을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 믿고 믿으며.



출처 : 해럴드경제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이다. 남녀분반이었던 고등학교에서 남녀가 마주칠 수 있었던 곳은 단 두 곳뿐이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벌떼처럼 몰려드는 '지하매점'과 나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 자습여건을 보장했던 '학습실'. 급격하게 성적이 올랐던 나는 난생처음으로 학습실로 배정을 받았다. 당시 학습실은 나에겐 동경의 대상이었고, 감히 근처도 못 가는 곳이라 생각해 왔던 터라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용기를 내어 문을 연 순간 나와 어떤 여학생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직도 이 순간을 기억하는 이유는 토끼처럼 동그랗고 맑은 그녀의 두 눈동자 때문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두 눈은 마치 '처음 보는 애인데 여기에 왜 온 거지? 문제집 빌리러 왔나?'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는 학교 내에서 유명했다. 공부를 꾸준히 잘해 학습실은 항상 그녀의 차지였고, 얼굴도 하얗고 예뻐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알았다. 그에 반해 나는 안경잡이에 더벅머리였고, 얼굴도 까무잡잡했으며 갑자기 성적이 오른 '졸부'였기에 다들 언젠가 성적이 떨어져 학습실에서 튕겨져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 선생님을 꿈꾸던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사관학교 입시회'. 멋진 정복을 차려입고 단단한 풍채를 뽐내던 사관생도에게 이끌려 육군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성적이 한참 모자랐기에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다. 학습실에서 우연히 그녀와 만날 때,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내 속에서 꿈틀댔던 그녀의 대한 호감을 외면했다. 그녀의 친구로부터 그녀도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기적과 같은 얘기를 접했을 때도 차마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사관생도 정복을 멋지게 입고 그녀에게 당당하게 나타나기 위해.


 결국, 그토록 바랬던 합격증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해 재수를 선택했고,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출처 : 국방TV

 그저 정복이 멋있어서 입학을 신청했던 나에게 고등학생 신분에서 사관생도로 탈바꿈하는 '기초군사훈련'은 지옥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장교로 임관한다는 기본적인 사실도 모른 채 입교한 나는 호랑이 같은 선배 생도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렸고, 고된 훈련이 끝난 밤에 수양록(일기)을 쓸 때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쳤다. '왜 말 한마디 하지 못했을까'라며 나 자신을 자책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기초군사훈련을 끝마치고 정식으로 입학했으나 당시 1학년은 휴대폰을 교내에 휴대할 수 없다는 규정에 의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7개월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고, 하계휴양(방학) 때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했을 때 이미 다른 사람이 이미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그리워하던 어느 날, 고향에 내려와 병원에 들를 일이 있어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순간 그토록 바라왔던 그녀가 운명처럼 서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복을 입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내렸고 그렇게 우리는 또 엇갈렸다. 이미 그녀의 친구에게 삼수를 한다는 소식과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2학년이 끝나던 무렵, 페이스북을 접하며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길었던 수험생활을 끝내고 서울에 유수대학으로 진학한다는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와 밝은 웃음, 토끼 같은 눈망울은 그대로였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팔로우하고 잘 지내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밝게 잘 지낸다고 하며 나에게 잘 지내냐고 물어봤다. 그녀를 계속 그리워했기에 잘 지내지 못했지만 애써 마음을 감추고 잘 지낸다고 답했다. 한 마디라도 더 걸기 위해 내 후배 중에 괜찮은 친구 있는데 혹시 친구 중에 소개해줄 만한 사람이 있냐고 물어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황당한 얘기지만, 당시 나는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내 후배와 그녀의 친구가 소개팅을 했지만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때 후배가 참 야속했다. 선배의 간절한 마음도 모르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서로에게 멀어졌다. 그리고 그녀를 잊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페이스북을 언팔로우하고 연락처도 삭제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난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장교로 임관했고,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는 강원도 인제로 발령받았다. 부모님께서 나를 처음 인제로 데려다주시고 가실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정말 외로웠다. 깊은 산골짜기에 덩그러니 떨어진 기분이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부대 업무에 몰두했다.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과 일하게 되어 조금씩 적응했다. 마음에 조금씩 여유가 생길 때쯤 마음속 깊이 있던 그녀가 다시 떠올랐다. 연락처를 삭제한 바보 같은 나를 자책하며, 혹시나 마음에 클라우드를 뒤지니 그녀의 연락처가 있었다. 그녀의 프로필 사진에 그녀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연락했다. 우리 한번 만나자고.

출처 : 지니뮤직


 그렇게 우린 고등학교 시절 첫 만남으로부터 6년 후 사랑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인제까지 160km. 버스를 타고 약 2시간 30분을 이동 후 지하철로 약 1시간을 가야 만날 수 있었지만, 그 길었던 이동시간도 나에겐 설렘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고, 전방 경계작전으로 인해 휴가와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었던 기간도 있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서로를 만난 우리에게 그 정도 난관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의 군생활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고, 새벽근무가 끝난 오전 2시에 공중전화로 연락해도 반갑게 받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멀리서 서로를 그리워했고 응원하며 우리의 사랑을 키워갔다.




 그로부터 약 6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 두 돌이 지난 사랑스러운 아들과 함께.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내는 고등학교 시절, 선비같이 공부만 하며 지나가는 나를 보며 '저런 사람이라면 나중에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다.'라고 생각하며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 자기 친구한테 시켜서 나한테 말을 걸었던 적도 많았고 몰래 내 책상에 마이쮸를 놓고 간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이랑 나눠먹었다. 아내가 그때 내가 정말 야속했다고 했다.


 대학교 1학년때 우연처럼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날, 아내도 나를 알아보고 어머니(장모님)께 나를 본 것 같다고 말까지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같은 외국어고등학교 러시아어과에 응시해서 같은 면접장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물론 모두 낙방했다. 참 신기한 인연이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이를 재우다 함께 잠든 이 순간의 아내도 여전히 사랑스럽다. 수없이 많이 이사를 다니며 연고도 없는 시골에 홀로 지내온 시간, 홀로 독박육아를 해야 했던 고된 시간을 인내하며 부족한 나와 함께해 준 아내에게 정말 미안하고 감사하다. 앞으로 우리에게 힘든 시간도 있겠지만, 돌고 돌아 만난 우리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인생을 함께 걸어갈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영화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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