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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Jun 23. 2024

F6. INTEL

 반도체 기술의 역사상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지만, 제일 크게 노력한 사람을 한 사람 들라면 필자는 서슴없이 미국의 노이스(Robert Norton Noyce, 1927~1990)를 꼽고 싶다. 그를 감히 반도체 기술과 산업의 아버지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반도체 물리로 MIT에서 받았고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에 합류했고 젊은 나이인 1957년에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Fairchild Semiconductor Corporation)를 8명과 공동 창업했고, 첫 집적회로(monolithic integrated circuit, microchip)의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제작하였다. 그 후 10여 년 뒤인 1968년에 인텔(Intel Corporation)을 공동 창업하여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PC) 혁명에 불을 붙였다. 그는 살아있을 때 ‘실리콘 밸리의 시장(Mayor of Silicon Valley)’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오늘날의 실리콘 밸리가 있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애국심도 대단하여 미국의 반도체 제조 기술이 일본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에 과감히 1978년 미국 반도체 연합회(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 SIA) 회장이 되어 텍사스주 오스틴(Austin, Texas)에 세마테크(SEMATECH)라는 민관 합동 회사를 주도적으로 세워 활동하다가 불시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노이스는 아이오와주 벌링턴(Burlington, Iowa) 출신으로 그리넬 대학(Grinnell College)에서 물리와 수학으로 1949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MIT의 물리학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재학 중에 그는 마음이 급하고 머리 회전이 빨라 대학원 친구들이 그를 ‘빠른 로버트(Rapid Robert)’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1953년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MIT로부터 받았다. MIT를 떠나 필라델피아에 있는 필코 회사(Philco Corporation)에 취직했다가 1956년에 사직하고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 있는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에 들어갔다. 거기서 한 1년쯤 있다가 쇼클리의 회사 관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8인의 반란자’와 함께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를 창업하였다. 투자자였던 페어차일드(Sherman M. Fairchild, 1896~1971)에 의하면, 노이스의 반도체 비전에 관한 발표에 반하여서 반도체 부문을 창설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덟 명의 젊은 과학자 중에서 노이스가 유일한 반도체 기술자였다.

      

 노이스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IC)의 발명자로도 유명하다. TI(Texas Instruments)의 킬비(Jack S. Kilby, 1923~2005)가 1958년에 게르마늄 기판에 반도체 공정을 이용한 하이브리드 집적회로(hybrid IC)를 발명한 이후에 노이스는 1959년에 독립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집적회로(monolithic IC)를 발명하였다. 그의 특허는 ‘Semiconductor Device and Lead Structure’라는 제목으로 1959년 7월에 미국 특허 번호 2,981,877로 출원되고, 1961년 4월에 등록되었다. 노이스의 칩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졌고, 킬비의 발명보다 더 실용적이었다. 모노리식(monolithic)은 ‘단일 돌’ 즉 하나의 실리콘 웨이퍼 위에 여러 가지 회로가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킬비의 특허는 게르마늄 웨이퍼 위에 회로를 집적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외부에 도선이 연결되어 있어서 대량생산이 용이(容易) 하지 않은 단점이 있다. 노이스의 특허는 하나의 실리콘 웨이퍼 위에 능동 회로 성분(active circuit component)뿐만 아니라 수동 회로 성분까지 집적하게 되어 있어서 기술적인 우위가 있었다. 그의 특허는 8인의 반란자 중의 한 명이었고 같은 회사의 회르니(Jean Hoerni, 1924~1997)가 1959년 초에 발명한 플래나 공정(Planar Process)에 기초를 두고 있다.

     

 집적회로 발명의 우선권에 관하여 두 발명자의 소속 회사 간의 법적 다툼이 장기간에 걸쳐 있었는데, 미국 법원은 결국 TI의 킬비 손을 들어주었다. 공식적인 집적회로의 첫 발명자는 킬비라고 판결되었다. 킬비의 특허 출원이 노이스보다 6개월 앞섰다는 사실이 결정에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킬비나 노이스 중에서 누구도 집적회로의 공동 발명자라는 타이틀을 부정하지 않았다. 2000년에 스웨덴의 노벨상 선정 위원회는 반도체 칩이 현대 문명에 끼친 영향력을 반영하여 그 발명자인 킬비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하였다. 킬비는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그의 IC 성공에 기여(寄與)한 몇 사람 중에 노이스를 세 번이나 언급하였다. 이때는 이미 10여 년 전에 노이스가 사망한 후였다. 살아있었다면 노이스에게도 노벨 물리학상을 주었을 터인데.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노이스는 1968년에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를 그만두고 동료인 무어(Gordon Moore, 1929~2023)와 함께 산타클라라(Santa Clara)에서 인텔(Intel Corporation)을 창립하였다. 회사 초대 이사회 의장이고 실리콘 밸리의 주요한 벤처투자자였던 록(Arthur Rock, 1926~ )이 회사의 성공을 위하여 두 사람 이외에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의 엔지니어였던 그로브(Andrew S. Grove, 1936~2016)의 합류를 강력히 추천하여 영입에 성공하였다. 당시 설립자나 투자자의 이름을 회사명에 넣는 관례에 따라 노이스와 무어는 새 회사의 이름을 노이스-무어 전자 회사(Noyce-Moore Electronics Corporation)로 정했다. 그러나 회사 이름이 ‘잡음 더’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Noise More)와 발음이 비슷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이들은 집적회로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한 뒤, ‘집적’을 뜻하는 ‘Integrated’와 ‘전자’를 의미하는 ‘Electronics’ 두 단어를 조합해 인텔(Intel)이라고 회사 이름을 지었다. 이것이 인텔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인텔은 지능, 지성을 의미하는 영어(intellect) 혹은 관련 단어의 앞부분이어서 좋은 작명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후로 실리콘 밸리의 반도체회사들은 인명보다는 보통명사의 조합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인텔을 창업한 노이스는 자신이 직접 CEO를 맡고 새로운 벤처회사를 키워 나갔다.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 시절에 형성된 그의 경영 스타일은 새 회사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종업원을 가족처럼 대하고 직접 소매를 걷어붙여 일을 처리하는 그의 회사 관리 자세는 후의 경영진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회사의 자동차, 주차장, 가구 등을 수수하게 갖추고 덜 관료화되고 자유 분망한 직장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노이스는 발명한 실리콘 집적회로의 집적도를 높이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1979년 CEO 자리를 동업자인 무어에게 넘겨주고 인텔을 떠났다.

     

 인텔의 공동 창업자이자 2대 CEO인 무어(Gordon Moore, 1929~2023)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1950년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를 졸업한 뒤, 1954년 CALTECH(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물리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노이스와 무어의 인연은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에 합류하면서 시작되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의 연구 개발 분야 책임자였던 무어는 1965년에 반도체 칩의 집적도 추이에 관한 글을 잡지 ‘Electronics Magazine’에 발표하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라고 부른다. 이는 반도체 칩 안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숫자가 매년 두 배씩 늘어난다는 법칙이다. 그 뒤에 성장 속도가 둔화(鈍化)되어 1975년 저자 자신이 매년(every year)격년(every other year)으로 수정하였지만, 무어의 법칙은 가격이나 성능 면에서 디지털 능력이 지수적으로 계속 증가한다는 중요한 하이테크 법칙 중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만 해도 미국 기업들은 대형 컴퓨터인 메인 프레임 컴퓨터(Main Frame Computer)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 컴퓨터의 메모리 장치는 낙후된 상태였다. 기업들은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쉽게 저장할 수 있고 빠르게 검색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새로운 컴퓨터를 원했다. 노이스와 무어는 메모리 셀을 통합하는 방법만 고안해 낸다면 컴퓨터 메모리는 훨씬 소형화되고 빨라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1969년 인텔은 SRAM(Static Random Access Memory) 칩과 ROM(Read Only Memory) 칩을 선보였으나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1년 뒤, 인텔은 DRAM(Dynamic Random Access Memory) 칩을 출시했는데, 이는 시장에 있는 타사의 제품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새 제품은 높은 성능으로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고, 제품 출시 2년도 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반도체가 되었다. 이로써 인텔은 유명한 반도체 메모리 회사가 되었고 이 성공에 힘입어 1971년 공식적으로 첫 흑자를 기록했다. 창업 이후 10년간 인텔의 수익률은 총매출의 25%가 넘었는데, 이는 메모리 산업을 사실상 독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 일본 업체들이 메모리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인텔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은 인텔이 거래하는 메모리 가격에 10%를 할인해서 판매했다. 이러한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무차별적인 공습에 인텔은 원가도 회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1985년이 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惡化)되어, 인텔은 회사 운영 자체가 힘들어졌다.

     

 인텔의 설립과 함께 첫 번째 직원으로 입사한 그로브는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으로 1956년 헝가리혁명으로 고생하다가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으로 이민 와서 뉴욕 시립대학(City College of New York)에서 화학공학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버클리 대학교에서 1963년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연구 분야는 실리콘 산화물 형성 공정으로 당시에 막 개발된 실리콘 MOSFET 소자 제조에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그가 저술하고 1967년에 출간된 ‘반도체 소자의 물리 및 기술(Physics and Technology of Semiconductor Devices)’이란 책은 이 분야의 고전이 되어 지금도 읽히고 있다. 1967년에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로 옮긴 그는 뛰어난 연구 실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엔지니어였다. 이미 하나의 기판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노이스는 메모리 칩의 개념과 설계 회로를 담당했고, 그로브는 메모리 칩을 실제로 제조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반도체 메모리 칩으로 회사의 경영이 본궤도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으나, 일본 회사들의 도전으로 인텔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였다. 당시 사장이었던 그로브는 CEO인 무어와 협의하여 1985년 메모리 산업 포기를 선언하고 구조조정에 들어가 1986년에 메모리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리고 1987년 무어는 CEO 자리를 그로브에게 넘기고 은퇴하였다.

    

 인텔이 메모리 사업을 포기하고 주력으로 시작한 분야는 CPU(Central Processing Units), 이른바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인텔은 1971년 세계 최초로 탁상용 전자계산기(calculator)에 들어가는 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인 4004를 출시하고, 1972년에는 최초의 8비트 CPU인 8008을 출시했다. 1974년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8008보다 처리 속도가 10배 빠르며 64KB의 메모리를 다룰 수 있는 최초의 범용 마이크로프로세서인 8080을 출시하였다. 1975년,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이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중 하나인 알테어(Altair) 8800에 사용되면서 PC의 가능성을 열었다. 1976년,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8085를 발표했고 세계 최초의 단일 보드 컴퓨터(single board computer)를 출시하였다. 1977년에 발표한 최초의 단일 칩 코덱(Single Chip Codec)은 통신 산업의 표준이 되었다. 1978년, PC를 위한 첫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8086을 출시하였다. 1979년,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8008보다 처리 속도가 10배 빠르고 64KB의 메모리를 다룰 수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 8088을 출시한다. 1980년, 인텔은 마이크로컨트롤러(Microcontroller) 8051과 마이크로컨트롤러 8751을 출시했다. 1981년에는 IBM이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8088을 IBM PC의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채택한다.     

 1981년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Corporation)이 개발한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PC)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여기에 채택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8088의 판매가 급성장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입지를 굳히게 된 인텔은 컴팩(Compaq) 회사에 새로 개발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80386을 탑재한 PC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이로부터 1990년대 초에는 그동안 IBM이 차지했던 데스크톱 시장 점유율 1위를 컴팩이 차지하게 되었다. 인텔은 컴팩의 성공으로 인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더 이상 IBM의 하청 업체가 아니었으며 컴퓨터 시장에서 인텔은 가장 영향력 있는 하드웨어 업체로 자리 잡았다. 386 PC의 성공으로 1987년에는 2억 4천만 달러의 흑자회사가 되었다. 이 성과 덕분에 그로브는 인텔의 CEO 자리에 앉게 되었다. 또한 인텔은 마침 IBM PC 호환 컴퓨터에 운영체제를 공급하며 성장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MS)와 손을 잡고 PC 시장에서 IBM을 제쳤다. 이전까지 IBM이 전 세계 PC에 적용할 규칙을 만들었다면, 이때부터는 인텔과 MS가 PC의 규격을 합의한 뒤 외부에 발표하면 그것이 곧 컴퓨터 업계의 표준이 되었다.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제품명인 x86 시리즈는 곧 유명해지고 한국 정치판에서도 x86 바람이 불었다. 한편 PC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인텔은 자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복제하는 업체들로 인해 고민에 빠졌는데, 그중 대표적인 회사가 AMD(Advanced Micro Devices)였다. 인텔이 386을 판매하면 AMD는 Am386을 발표했고, 인텔이 486을 발표하면 AMD는 Am486을 발표하는 식이었다. 인텔은 복제 회사들을 특허 침해로 법원에 고소하였으나 미국 법원은 미국 사회에서 독점을 반대한다는 정신에 근거하여 인텔의 패소를 판결하였다. 이에 그로브는 1993년에 출시된 586 CPU에 기존 방식이 아닌 새로운 이름, 즉 펜티엄(Pentium)이라는 고유 상표를 등록해서 판매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인텔은 반도체 업계에서 승승장구했다. 1995년에 세계 반도체 매출액 1위 회사에 올랐고 이는 2017년까지 계속되었다.

     

 1998년, 변화하는 인터넷 환경에 맞는 새로운 경영을 위해 그로브 회장이 물러나고 배럿(Craig Barrett, 1939~)이 네 번째 CEO가 되었다. 이때부터 인텔의 방향이 급격히 바뀌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마이크로프로세서 중심 구조에서의 탈피였다. 배럿은 인터넷 사업으로의 확장을 통해 다양성을 추구했다.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외에도 컴퓨터 아키텍처(Computer Architecture)와 인터넷 구성 요소인 칩(Chip), 보드(Board), 시스템(System), 소프트웨어(Software), 네트워킹(Networking) 및 통신(Communication) 장비와 서비스로까지 영역을 확대해 왔다. 배럿은 샌프란시스코 태생으로 스탠퍼드 대학교를 1957년부터 1964년까지 다녔고 여기서 재료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바로 같은 과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저술하고 1973년에 출판된 ‘The Principles of Engineering Materials’의 주저자로 유명한데 필자도 대학원 시험 준비할 때 정독하였다. 필자가 1980년대 초에 미국에 유학할 학교를 선택할 때 스탠퍼드 대학교 재료공학과의 교수 명단을 살펴보았는데 그때 그의 이름이 안 보였다. 그때는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반도체회사에 근무할 때인 1990년대 초에 미국에서 있는 반도체 산업 관련 콘퍼런스에 출장을 갔는데 기조 발언자로 나선 배럿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인텔의 제조 담당 부사장으로 소개되었다. 출장에서 돌아와서 그의 이력을 찾아보니 1974년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인텔의 생산부장으로 옮겨갔다. 앞으로 반도체 제조 회사에서 재료 관련 기술이 중히 쓰이리라는 판단으로 그의 영입을 추진한 당시 인텔 경영자들의 결정이 주효했고, 교수 자리를 그만두고 신생 회사의 생산부장으로 들어가기로 큰 결정을 내린 배럿의 용단이 단연 돋보인다. 종합반도체 회사를 고집한 인텔은 자기가 판매하는 칩은 자신이 제조한다는 철학을 고수하였는데, 그 중심에 앞의 CEO 그로브와 뒤의 CEO 배럿이 있었다. 특히 인텔은 반도체 제조시설인 팹(FAB)을 여러 군데 건설했는데 공장의 위치가 다르더라도 단위 공정의 제조 장비는 어디서나 같은 기종을 사용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었다.


 배럿 뒤를 이어 2005년 다섯 번째로 바통을 이어받은 인텔의 CEO는 오텔리니(Paul Otellini, 1950~2017)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대학교(University of San Francisco)에서 1972년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고 1974년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를 받은 후 인텔에 입사한 후 30년 넘게 영업(Sales & Marketing) 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퀄컴(Qualcomm)과 ARM(Advanced RISC Machines) 홀딩스와의 경쟁에서 인텔이 앞설 수 있도록 주도적으로 이끌었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기존 PC를 대체하며 급변하는 모바일 시장에서 인텔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2013년 CEO를 사임하였고 새롭게 크르자니크(Brian Krzanich, 1960~)가 제6대 CEO로 취임하였다. 산타클라라 출신으로 산호세 주립대학교(San Jose State University)에서 1982년 화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후 인텔에 입사하여 주로 반도체 제조 팹에서 일한 후 경영에 참여하여 최고의 직위까지 올랐다. 회사의 공급망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문제 되는 광물질(conflict minerals)을 제거하는 데 공헌하였다. CEO 자리에 있으면서 이동전화 칩 시장에서 철수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한편으로 인텔의 사업영역을 CPU(central Processing Units) 이외의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려고 노력하였다.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와 한국의 삼성전자와 나노미터 칩의 생산으로 경쟁하여야 하고, 죽은 줄 알았던 AMD가 세월이 지나면서 CEO의 세대교체 후에 CPU 시장에서 점유율을 크게 늘리고 있다. 반도체 생태계도 크게 바뀌어 팹리스(Fabless) 회사가 크게 성장했고 CPU 대신 GPU(Graphics Processing Unit)가 대세가 되어 새로운 반도체회사들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반도체 매출이 저하되고 세계 반도체 매출 1위 자리를 지키는 게 어려워졌다. 크르자니크는 개인적인 문제로 2018년에 인텔의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에 재무 전문가인 스완(Robert Swan, 1961~)을 거쳐 인텔에서 뼈가 굵은 정통 엔지니어 출신인 VMware 회사 CEO인 겔싱어(Patrick P. Gelsinger, 1960~)를 2022년 신임 CEO로 초빙하였다. 겔싱어는 펜실베이니아주(Pennsylvania) 출생으로, 어릴 적에 천재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링컨 기술학교(Lincoln Technical Institute)를 졸업한 뒤 18세의 나이에 1979년 인텔에 입사한 뒤에 386 프로세서 디자인 팀의 디자인 엔지니어였고, 486 프로세서 디자인 책임자였다. 회사에 재직하면서 1983년에 산타클라라 대학교(Santa Clara University)에서 전자공학 학사학위, 1985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32세 때인 1992년 Personal Computer Enhancement Division 담당 인텔 최연소 부사장, 2001년 인텔 첫 번째 CTO(Chief Technical Officer), 2005년에 Digital Enterprise Group 담당 부사장을 역임하고 2009년 인텔을 떠났다가 2022년 CEO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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