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레스트 강 Jul 16. 2024

F8. 일본의 득세와 몰락

 일본은 1970년대 석유 파동, 그로 인한 1980년대 조선산업의 구조 조정 등을 겪으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개발에 대해 고민했다. 일본은 통상산업성(Ministry of International Trade and Industry; MITI)을 중심으로 향후 일본 경제를 이끌 첨단산업 분야를 찾았고, 메모리 반도체 특히 그중에서도 DRAM(Dynamic Random Access Memory) 반도체의 개발 및 생산을 그 핵심으로 판단하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단체 총연합회인 경단련(經團聯)의 주도로 통상산업성의 보호 아래 관련 기업을 성장시켰다. 일본 정부의 주도 아래 일본 반도체 산업은 반도체 소자 제조업체, 소자 제조 장치 제작업체, 소재 업체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산업구조를 형성하였다. 이에 정부 정책뿐만 아니라 일본 산업계의 폐쇄적인 재벌 문화까지 더해져서 미국산 제조 장치나 소재들이 일본 반도체 제조업체의 라인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규모의 경제와 산업 파생 효과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반도체 관련 투자와 연구 개발에서 당시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하던 미국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반도체 기업과 비교해 수율도 높을 뿐만 아니라 무려 10%나 저렴한 가격에 반도체 메모리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여기에 당시 저평가돼 있던 엔화 환율, 값싼 노동력도 유리한 수출 환경 조성에 힘을 보탰다. 이렇게 일본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초중반 세계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나갔다.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관련 인재들은 모스텍(Mostek)이란 회사로 몰려들었으나 이 회사는 곧 파산하고 마이크론(Micron Technology)을 설립하였다. 1984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모토로라, 인텔, 마이크론 등을 앞세워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고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성적도 좋았지만 1985년을 변곡점으로 상황이 크게 반전되었다. 이전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양분하던 미국과 일본 사이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제2의 진주만 공습에 비유될 정도의 일본산 반도체 수출이 미국 반도체 산업에 치명타를 입혔고 미국산 전자기기에 일본산 반도체 메모리 사용이 급증했다. 빠른 기간에 우후죽순 늘어난 일본 업체들의 영향으로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이상 현상도 발생하면서 메모리 가격이 폭락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인텔 등 미국의 반도체 업체 대부분이 메모리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공격적인 덤핑 공세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하였다.

     

 1971년도 세계 반도체 매출액 탑 5(Top 5)가 TI(Texas Instruments), 모토로라(Motorola), 페어차일드(Fairchild), 내셔널 세미컨덕터(National Semiconductor), 시그네틱스(Signetics) 등으로 미국 기업 일색이었는데, 1981년으로 가면 TI, Motorola, NEC(Nippon Electric Corporation), 히타치(Hitachi), 도시바(Toshiba) 등으로 일본 기업이 끼어들더니 1991년에는 NEC, Toshiba, Hitachi가 상위 3위를 차지하였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도 일본 반도체 산업의 강세가 꺾이지 않자, 미국 반도체 산업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고 미국은 ‘공정 무역(Fair Trade)’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통상 압박을 시작하였다. 1985년 미국의 반도체산업협회(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 SIA)는 무역대표부(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 USTR)에 청원을 넣었다. 미국 SIA는 일본 시장의 진입 장벽, 외국산 반도체 차별,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원, 정부 주도의 반도체 투자 및 생산설비 확대 등을 문제 삼았다. 바로 뒤에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이 일본 반도체 기업인 히타치, 미쓰비시, 도시바, NEC 등 7곳을 덤핑 혐의로 USTR에 제소했다. 이어 인텔, AMD(Advanced Micro Devices), 내셔널 세미컨덕터(NS)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일본 업체들을 대상으로 덤핑 관련 제소가 이어졌다. 미국의 대일본 통상 압박의 정점은 상무부가 찍었다. 당시 미국의 상무부 장관은 일본 반도체의 덤핑 혐의에 대한 직권조사로 압박 강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직권조사란 기업들의 제소 없이도 상무부 직권으로 특정국 수출품의 덤핑 여부 등을 조사하고 이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역 제재 수단이다.

     

 일본 정부의 로비 등 그 어떤 외교적인 노력도 양국 간 무역역조 심화와 통상갈등 등으로 예민해진 미국에 통하지 않았다. 미국의 SIA 등은 1985년에 일본 기업과 일본 정부의 반도체 대책에 대하여 덤핑 방지법(Anti Dumping Act, 1979)과 미국통상법 301조에 기초하여 협정을 제안하였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 양자 협정문에 서명했다. ‘미일 반도체 협정’은 미국과 일본 간의 반도체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986년에 체결된 협정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미국 정부와 일본 기업 간의 협정 이른바 서스펜션 협정과 (2) ‘미일 반도체 조약’으로 약칭되는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협정을 의미한다. 두 번째의 정식 명칭은 '미합중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반도체 제품의 무역에 관한 조약(Arrang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Government of Japan concerning Trade in Semiconductor Products)’이다. ‘서스펜션 협정’에 의해 일본 기업은 공정가격 이하의 가격으로 미국에 반도체 제품을 수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또한 ‘미일 반도체 조약’에 기초하여 시장접근의 개선과 감시제도 등에 의한 덤핑의 방지가 도모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당시 10% 수준이던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1992년까지 20%로 높이고 반도체 덤핑 수출을 중단하기로 합의했으며 미국의 대일본 반도체 직접 투자 금지도 철폐해야 했다.

      

 협정 체결 후에도 미국은 일본의 미준수를 거론하여 보복관세 부과 압박, 일본 반도체 산업 감시 등의 압박을 이어갔다. 미국은 1987년에 일본 정부가 ‘미일 반도체 조약’을 준수하고 있지 않다고 하여 통상법 301조에 기초한 보복을 가하였다. 한편, 유럽 공동체(EC)는 ‘미일 반도체 조약’ 중 제3 국 시장가격의 감사를 정한 부분을 가트(GATT) 협정 위반으로 WTO(World Trade Organization)에 제소하고 EC의 주장을 인정하는 소위원회 보고가 채택되었다. 1991년 상기 ‘미일 반도체 조약’은 기한이 만료되어 종료하였지만, 이것을 대신하여 제2차 ‘미일 반도체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동 조약에서는 가트 소위원회 보고를 고려하여 제3 국 시장의 감시제도는 폐지되었다. 제2차 ‘미일 반도체 조약’은 1996년에 기한이 만료되어 종료되었다.

     

 실제로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일본 정부가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미국 반도체 업계의 일본 투자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면서 정작 일본 기업들은 미국 내에 공장을 건설하고 위기에 빠진 미국 반도체 기업을 매수하려고 시도하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 일본 제품의 경쟁력에 힘입어 큰돈을 번 일본의 기업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무차별적으로 부동산과 기업을 사들였다. 특히 1986년 후지쯔(Fujitsu)의 페어차일드 반도체 인수 시도는 미국 정가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일본은 자국 산업의 육성을 빌미로 대놓고 미국을 상대로 보호무역을 가했다. 그래서 미국이 부당하게 일본을 상대로 통상 압력을 가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실상은 이런 이유로 경제 논리에서 미국이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원래 미국과 일본은 친한 나라였다. 유럽의 제도와 문명을 받아들여 미국보다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일본은 남북전쟁 등 내부 의사 정리하느라 늦게 세계열강에 합류한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기습이라는 오판을 통하여 세계 2차 대전에서 서로 적대국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을 통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파트너 관계였다.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에 고민하던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소련과 그 공산주의 위성국가를 포위한다는 의미에서 일본을 자기 진영으로 온전히 만들기 위하여 전범국인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소련과 반분한 바 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정부의 공산주의자 박멸 정책이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에게는 큰 유혹이었을 것이다. 소련으로 보아서도 반공주의의 일제보다는 공산주의자가 많았던 한민족을 분할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일본은 세계대전 이후에 소련과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한국전과 월남전을 통하여 자국민의 참전 없이 미국의 도움으로 패전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 때 상대 비행기나 함정에 부딪히는 자살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를 생각하면 일본이 쉽게 전쟁에 항복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 아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을 두 번이나 사용했다. 일본이 전쟁에 항복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미국 군대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서양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일본 사람들은 공손한 얼굴로 중세의 노예들처럼 승리자를 환영했으며, 미군이 진주할 때 길거리에 엎드려 존경을 표했다. 가미가제 특공대와 함께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 일본인의 두 얼굴을 처음에는 서양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일본은 미국과의 경제 전쟁에서도 결국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1996년 이 협정의 종결 당시 미국은 목표한 일본 내의 미국산 반도체의 점유율을 이뤄냈지만 일본 반도체는 이미 회생 불능 상태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소재, 제조 장치 이른바 '소부장'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고 세계적인 메모리 제조 전방 반도체회사들은 르네사스나 엘피다 등의 합작회사를 설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합작회사 중 일부는 결국 파산했으며 삼성전자 등 한국의 기업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술 발전을 거듭해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만약 이 협정으로 미국이 일본에 철퇴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10개에 육박하던 일본의 DRAM 제조사들이 일본 정부의 지원 아래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지금만큼 잘 나가는 상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1995년 세계 반도체 매출은 회사별로 인텔, NEC, Toshiba, Hitachi, Motorola의 순서로 DRAM 시장에서 철수한 인텔이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의 개발과 생산으로 1위에 등극하였다. 2003년의 반도체 매출실적을 보면 1위는 점유율 15%의 인텔이, 2위는 5.3%의 삼성전자가, 3위는 4.4%로 히다치와 미쓰비스가 합작한 르네사스(Renesas)가 차지하였다. 이로써 세계 반도체 시장은 비메모리의 인텔과 메모리의 삼성전자가 양분하게 되었다. 2018년에는 삼성이 약 16%로 1위로 올랐고, 인텔이 약 14%로 2위, SK Hynix가 7.6%로 3위였으며, 그 뒤는 Micron Tech, Broadcom, Qualcom, TI 순이었다. 미국의 팹리스(Fabless) 회사들이 성장하면서 최근에는 대만의 파운드리(Foundry) 전문회사인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의 매출이 급증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함께 반도체 강국으로 급성장한 대만은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누린 혜택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거기에 일본 기업들이 전성기에도 그다지 잘하지 못했던 파운드리 쪽으로 TSMC는 특화되어서 엔비디아 같은 신흥 팹리스 기업들과 동반 성장하였다. 대만은 메모리 쪽으로는 애초에 진입도 늦은 데다 90년대 말에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대거 몰락하고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메모리 기술을 퍼다가 줬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인 능소(淩宵) 이어령(李御寜, 1933~2022) 선생은 1982년에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일본어로 쓴 책에서 일본의 반도체 메모리 제조 기술이 우수한 것은 일본 사람들이 커다란 물건을 조그맣게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여 큰 반향을 한일 양국에서 일으켰다. 선생은 축소지향의 모형을 여섯 가지로 분석하였다. 먼저 ‘동해의 작은 섬 갯벌 흰모래밭에 내 눈물에 젖어 게(蟹)와 노닐다’라는 24자(31음)로 된 일본의 유명한 단가(短歌)에서 ‘의’라는 조사를 세 개 중복해 사용함으로써 넓은 동해가 작은 섬으로, 다시 모래사장과 그 속의 극히 작은 흰모래까지 연결되고, 마지막에는 점에 불과한 게에까지 세계를 급격히 응축해 가는 수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큰 그릇 안에 점점 작은 그릇을 끼워 넣어 가는 이레코(入籠) 형식과 상통된다. 두 번째로 접는 부채와 우산의 제조와 판매를 들 수 있다. 세 번째 예로 축소형 인형(人形)을 들고 있다. 네 번째로 밥상을 조그맣게 이동할 수 있게 도시락으로 만들고 책도 문고판이나 콘사이스 사전으로 만들어 버린다. 제5의 형태는 시간적으로 축소하는 것으로 검도 등 운동에서 준비 자세를 강조하는데 이는 연속 동작을 슬로  모션(slow motion)으로 표현하는 영상 기술과 상통한다. 제6의 형태는 가문의 문장(紋章), 조직의 노래 등에 나타나는 상징주의이다. 이 교수는 이러한 방식으로 축소의 유형을 분류한 후에 그것들이 어떻게 조합되어 하나의 구조로서 일본문화에 나타나는가를 조원(造園), 꽃꽂이, 다도(茶道) 등을 통하여 분석해 나갔다.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 또한 ‘예능의 자(座)’, ‘마쓰리(축제)’와도 같이 ‘축소’ 지향성을 띠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업의 QC 서클인 분임조 토의 같은 사내 조직도 일종의 ‘자’에 해당하며, 이러한 제도하에서 값싸고 품질 좋은 일본의 자동차가 만들어진다고 분석하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