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 이른바 소련은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이른바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상대로 미국은 연합국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에서 전쟁의 승리를 주도하였다. 전후의 세계 전략을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짜게 되는데, 소련이 같은 편인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게 신경 쓰였다. 전후에 세계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으로 양분되리라고 볼 때, 체질적으로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미국으로서는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홀대할 수 없었다. 소수 민족인 조지아 지방 출신으로 소련의 절대권력자인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에게 전후에 원하는 지역을 선택하도록 하는데, 그는 소련과 같은 편으로 동유럽과 중국, 북한, 북베트남을 선택한다. 이를 이른바 공산권이라고 부르고 전후 미소의 대결을 냉전(cold war)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어느 정치가가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고 하는데, 전후에 세계를 양분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소련을 철의 장막 안으로 묶어 놓았다.
미국은 세계 제2차대전 중에 미군을 지휘한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로 국무장관 마셜(George Marshall, 1880~1959)이 주도한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는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을 세워 전후 서유럽의 동맹국들의 재건을 위해 많은 재정적 지원을 쏟아붓고,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를 결성하였다. 소련도 이에 맞서서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을 묶어 동맹을 결성하고 여러 가지 경제 원조를 실행하였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이라는 대륙이 공산화되었고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미국은 유엔이라는 국제적인 조직과 일본을 이용해서 공산권의 팽창을 막아 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베트남을 중심으로 공산권이 팽창하려고 했는데 이를 막아 보려고 미국은 월남전을 수행했지만 실패하였다. 베트남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1969년에 집권한 닉슨(Richard M. Nixon, 1913~1994)은 키신저(Henry A. Kissinger, 1923~2023)의 조언으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1972년 중국을 방문하였다. 이는 월남전 패배 후의 세계 질서 재편을 위한 정책 전환의 하나로, 근본은 공산권의 확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 질서의 변화는 중국 지도층의 결단이 필요하였다. 그중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덩 샤오핑(鄧少平, 1904~1997)의 역할이 컸다. 특히 덩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저우 사망 후에 지속적인 정책 추진에 큰 힘을 보탰다고 알려진다. 이러한 변화에는 그 결실을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덩은 젊은 시절인 1920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그는 르노 자동차 회사에서 트랙터를 만드는 노동자로 일했다고 하는데,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의 경험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덩이 저우를 만난 때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때 두 청년은 조국 중국의 미래를 위해 같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베트남의 호찌민(胡志明, 1890~1969)도 젊었을 때 미국의 뉴욕이나 보스턴에 거주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는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한 사람이다. 덩은 그 당시에는 유럽에서 사회주의에 매료되고 뒤에 소련으로 유학하여 공산당원이 되어 중국으로 돌아와서는 마오의 휘하에서 여러 직책을 수행한다. 문화대혁명 시절 한때 실각하는 등 고생을 하나 오뚝이처럼 부활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 고문위원회 주임을 겸직하며 최고 정치 실력자로 중국의 개방정책을 진두지휘한다. 덩의 개혁의 목표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인데 그 전략의 하나가 중국식 사회주의의 확장이다.
한편 공산국가의 맹주가 된 소련으로서는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여야 하는 대가가 무척 크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여러 소수 민족을 통합한 연방인 소련을 유지하기도 어려웠고, 위성국가들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면서 자기 정책에 순응하게 하기도 버거웠다. 결국 고르바초프(Mikhail S. Gorbachev, 1931~2022)는 이를 깨닫고 1991년 소련을 해체하고 미소 간의 냉전을 끝냈다. 소련의 중심이었던 러시아공화국이 탄생하였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독립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동유럽의 위성국가에 대한 영향력도 의식적으로 풀렸다. 당시 동유럽에 파견되었던 소련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푸틴(Vladimir Putin, 1952~ )은 옛 소련의 영광을 재건하겠다고 옛날 위성국가였던 우크라이나와 지금 전쟁하고 있다. 미국과의 개방정책으로 경제적인 대국이 된 중국은 세월이 흘러 시진핑(習近平, 1953~ )이 국가 주석이 된 뒤에 새로운 중국의 미래상을 설정하고 장기 집권을 도모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닉슨이 베이징을 처음으로 방문한 지도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중국의 경제적인 성장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에서 투자한 자본의 회수가 제도적으로 어렵게 되어 있음을 발견한 일본의 대기업들이 추가적인 투자를 보류하고 있는 사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초기에는 공장 건설 등에 여러 특혜를 주고 중국의 내수 시장과 수출 규모가 엄청나다는 점에 한국의 기업들이 솔깃하였지만, 제도적으로 자본의 회수가 어렵고, 초기에는 싼 인건비가 매력이었지만 노무비도 오르고, 잘못하면 사법적으로 회사 경영자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보호 아래 중국 회사들의 실력과 기술이 향상되는 점도 외국 투자자들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었다. 중국의 기업들은 전 산업적으로 제조업 분야에서 성장하여 중국이 전 세계에 공산품을 싸고 빠르게 공급하는 생산기지로 변모하였다. 때마침 미국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바람이 분 무선 휴대전화의 조립이 중국에서 싼 가격에 공급됨으로써 전자기기의 가격을 중국이 좌우하게 되었다. 아울러 중국의 기업은 자신의 제품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당황한 미국은 중국 기업이 지적재산권을 무시하고 모방을 일삼고 있다고 경고하였지만, 시장에서 실제적인 이득을 보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중국은 반도체 산업 분야에서도 욕심을 부렸다. 그동안 반도체 분야의 생태계도 크게 바뀌어 반도체 공장을 신규로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돈이 들었다. 대미 수출로 돈이 많아진 중국 정부는 큰돈을 투자하면 반도체 산업에서도 성공한다고 생각하였다. 삼성전자 등에 중국 현지에 팹을 짓도록 하는 한편 여러 중국의 기업들이 반도체 공장을 짓고 공정 장비를 사들였다. 그러나 제 성능을 갖는 반도체 칩이 경쟁력을 갖춘 수율을 유지하며 생산되지 못하였고, 한국이나 대만의 팹과의 경쟁에서 뒤져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공부한 기술자들에게 의존하였으나 이들의 유치에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도중에 미국의 새 정권들은 중국의 반도체 분야에서의 비약을 눈여겨보고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반도체 동맹을 새로 구축하고 중국을 사방에서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장비나 소재의 공급망 구조를 들여다보고 중국에 이것들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50여 년 동안에 세계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후공정인 반도체 조립 분야에만 위탁생산을 의뢰하였지만, 반도체 칩 제조 비용이 많이 들어감에 따라 반도체 제품 생산 판매 업체가 웨이퍼 상의 칩 제조공정을 외주로 주는 팹리스 반도체 회사가 늘어났다. 이러한 팹리스 회사의 칩 제조공정을 위탁받는 일을 파운드리(foundry)라고 한다. 이 말은 주물(鑄物) 혹은 주조(鑄造)라는 뜻인데 금속 제품 공정에서 용융 상태의 금속을 주형(鑄型)에 부어 원하는 입체의 금속 가공물을 제조하는 과정을 뜻한다. 반도체 회로 설계자가 파운드리 할 팹 공장의 프로세스를 잘 알고 포토마스크(레티클)를 제작하여 팹에 넘기면 주조 공장에서 주물을 찍어내듯이 순서대로 제작하면 최종 반도체 칩 완제품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파운드리로 유명하고 세계 유수의 회사로 성장한 회사가 타이완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이다. TSMC는 미국의 반도체 회사가 팹리스로 종국에는 간다는 경향을 파악하고 모리스 창(Morris Chang, 張忠謀, 1931~ )이 타이완 정부의 도움으로 1987년에 세운 회사이다.
창은 중화민국 반도체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중국 본토 저장(浙江) 성 닝보(寧波)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국공내전, 중일전쟁 등을 피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홍콩을 거쳐 미국에 이민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철학과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1949년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갔으나 현실적 이유로 인해 MIT로 전학하였다. MIT에서 기계공학 학사(1952), 석사(1953) 학위를 받았다. 석사 졸업 후에 전력공급장치 제조사인 Sylvania Electronic Products에 취직해 3년간 일하고, 1958년 Texas Instruments(TI)로 이직하여, 20년간 반도체 개발 및 제조공장에서 근무하며 1972년 반도체 부문 부사장, 1978년 그룹 전체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TI에 재직 중 회사의 지원 아래,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1964년 전기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General Instrument(GI)로 이적하여, 최고운영책임자(COO)로서 연구 개발 업무를 담당했다.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산업기술연구원(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ITRI) 원장직 제안을 받고, 1985년 타이완으로 옮겼다. 당시 중화민국은 1979년 터진 2차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 위기를 맞은 직후였다. 그는 중화민국의 산업구조가 팹리스 반도체 업체로부터 제조를 위탁받아 생산을 전담하는 파운드리 사업 모델에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1987년 TSMC를 창업했다. 이후 회사는 미국, 일본, 한국의 종합반도체 회사 사이에서 고생하다가 브로드컴, 마벨, 엔비디아 등의 미국 팹리스 업체가 TSMC에 반도체 칩 제조를 주문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세계 반도체 매출 1위 자리를 넘보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 등에 새로운 팹을 건설하고 있다. 그는 2005년 74세에 고령을 이유로 은퇴했지만 2009년 금융 위기로 인해 회사 매출이 급락하자 회사에 복직했다. 이후 그는 2018년 87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미국 반도체 업계에서 활약하는 두 명의 대만 출신 기술자가 유명한데, 바로 엔비디아(NVIDIA)의 CEO인 젠슨 황(Jensen Hwang, 黃仁勳, 1963~ )과 AMD의 CEO인 리사 수(Lisa Su, 蘇姿丰, 소자봉, 1969~ )이다. 타이완 타이난시에서 태어난 황은 9살 때 미국 켄터키주로 이민하여 살았으며 이후 오리건주에 정착했다. 1984년 오리건 주립대학교에서 전기공학 학사학위를, 1992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LSI 로직 회사에 들어갔고 그 뒤에 AMD(Advanced Micro Devices)의 마이크로프로세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1993년 엔비디아를 실리콘밸리에서 공동 설립했으며 현재 CEO이자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1999년에 공개된 엔비디아 주식의 3.6%를 소유하고 있다.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 따르면 2021년 4월 젠슨 황의 순자산은 143억 달러이다. 엔비디아 코퍼레이션(Nvidia Corporation)은 데이터 사이언스 및 고성능 컴퓨팅을 위한 그래픽 처리 장치(Graphic Processing Unit; GPU),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plication Processing Interface; API), 모바일 컴퓨팅 및 자동차용 SoC(System on Chip)를 설계 및 공급하는 소프트웨어 및 팹리스 반도체 회사이다. 엔비디아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업체이다. 2023년 엔비디아는 미국의 7번째 상장 기업으로 가치가 1조 달러를 넘었고, AI 기능을 갖춘 데이터센터 칩 부문의 선두 주자가 되면서 회사의 가치가 급등했다. 2024년 엔비디아는 시가 총액이 3조 달러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상장 기업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쳤다. 엔비디아의 성공 이후 그는 여러 가지 상과 인정을 받았다. 그중에서 2003년 팹리스 반도체 협회로부터 팹리스 반도체 산업의 개발, 혁신, 성장 및 장기적인 기회를 주도하는 데 탁월한 공헌을 한 리더를 인정하는 모리스 창 모범적 리더십 상을 받았다. 2009년 오리건 주립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8년 최초의 Edge 50에 등재되어 에지 컴퓨팅 분야에서 세계 50대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되었다. 2020년 국립대만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젠슨 황이 2021년 업계 최고의 영예인 로버트 N. 노이스 상을 수상했다고 발표했다. 2021년 시사잡지 타임(Time)에서 매년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목록인 ‘타임 100’에 포함되었다.
한편 리사 수는 타이완 타이난시에서 태어나 2살 무렵에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통계학자였고 어머니는 회계사였는데 교육열이 대단히 높아서 7살 때부터 피아노, 산수, 경제 등 다방면으로 가르치면서 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1986년 MIT에 입학하여 전자공학을 전공하였으며, 1991년 석사, 1994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박사 학위 지도교수는 그리스 출신으로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반도체 공정 모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안토니아디스(Dimitri A. Antoniadis) 교수였고 논문의 주제는 Silicon-on-insulator 웨이퍼의 제작이었다. 실리콘 웨이퍼의 표면과 하층 사이에 얇은 절연막을 추가하여 집적 회로를 제조하는 공정 기술로 고전압, 고온에서 저전력으로 빠르게 동작할 수 있는 반도체 칩 제작이 가능하다. MIT 졸업 후, TI에 들어가 잠깐 일하다가 1995년에 IBM으로 옮겨, 2007년까지 근무하다가, Freescale Semiconductor의 CTO(Chief Technology Officer)가 되었다. 2012년 IBM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AMD 이사회의 한 임원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AMD의 글로벌 비즈니스 매니저(부사장) 겸 총괄 책임자로 합류하였다. 2012년 AMD는 곧 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위기 상황이었다. AMD의 핵심 인력들이 다른 관련사, 경쟁사로 줄줄이 도망가는 등 최악의 상황까지 닥쳐 AMD의 끝이 코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총괄 부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적자에 시달리는 회사를 구해내기 위해서 2년간 사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서 여러 가지 승부수를 던졌는데 시장의 사업다각화 전략을 세웠다. 당시 CPU 시장에는 인텔이 있었고, GPU 시장은 엔비디아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AMD는 CPU와 GPU를 판매한다 해도 사후 지원에 들어가는 자금이 어마어마하므로 역량 강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판단하고, AMD가 CPU와 GPU 양대 시장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게임기 시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흑자 전환에 성공하였는데, 그 공로로 2014년 AMD 이사회는 그녀를 AMD의 사장 겸 CEO로 임명하였다. 그녀는 실리콘밸리 반도체 기업 역사상 최초의 여성 CEO다. 그녀는 CEO로 취임한 이후 스마트폰 사업 관련 고객 회사는 엔비디아, 퀄컴, 삼성이 분할하고, 노트북 시장 고객 회사는 인텔이 지배하고 있어 AMD의 제품 로드맵 실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녀가 AMD의 3가지 초점을 훌륭한 반도체 제품의 제작, 고객의 신뢰 강화, 회사의 슬림화에 두고 회사를 변모해 갔다. CPU 시장에서는 젠(Zen) 시리즈 제품으로, GPU 시장에서는 라데온(Radeon) 계열 제품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망한 줄 알았던 AMD를 구원한 그녀는 2019년 한 해 동안 가장 연봉이 높았던 CEO로 알려졌으며 여성으로서 최초라고 한다. 2022년 AMD 이사회에서 현직 CEO 겸 사장인 리사 수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했다고 발표했다. 젠슨 황과 리사 수가 친척 관계라는 루머가 있다. 리사 수 모친의 고종사촌 동생이 젠슨 황이어서 한국식으로 따져 황이 수의 외가 족으로 5촌 당숙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두 사람 다 몰랐다가 나중에 가계 조사를 통해 친척이라고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젠슨 황은 9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으나, 리사 수는 3살 때 이민을 왔기 때문에 중국어를 할 줄 모른다.
한자를 쓰고 중국말을 하는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지구 전체에 흩어져서 부와 기술을 축적해 왔다. 이런 모습은 유대인들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이런 중국 사람들의 역량을 모으면 세계를 석권할 수 있다고 믿어 왔고, 일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큰 자본을 투여하고 미국 등에서 활동하는 중국인들을 모으면 반도체 굴기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아마도 서방세계의 자유(freedom)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독재적인 중국의 융성을 개인적으로 돕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또한 미국, 일본, 인도 등 많은 나라가 중국의 지나친 확장을 경계하고 봉쇄하려는 정책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