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지우 Feb 06. 2023

노교수의 침묵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강의 도중 교수님께서 부르디외의 ‘cultural capital’이 어떤 개념이냐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대로 직역하자면 ‘문화적 자본’이다. 교수님께선 분명 지난 수업에 부르디외가 자본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또 그 앞에 붙은 ‘cultural’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해 주셨으나 그 내용은 우리 머리에서 이미 증발되고 없었다. 나는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이주 전 필기를 뒤져 우물쭈물 대답하다가 괜히 더 혼났다. 그럴 거면 필기하지 말라고 수업 내내 눈치를 주시길래 그날 속기는 아예 단념했었다.

이런 일은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럼에도 그날이 복잡한 감정과 함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이후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다.




교수님께서 우리에 대한 실망을 토해내며 수업하시다가 말씀을 멈추고 바닥을 수 초간 바라보셨다. 갑작스런 침묵에 강의실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여러분, 나는 고독한, 아주 고독한 지식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까지 이렇게 선생님 등 뒤에 비수를 꽂고 싶어?”


교수님의 처연한 모습에 놀라, 이후의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어노문학과 교수인 그는 당시 다음 해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었다. 첫 수업에서 당신의 벗들은 당신에게 ‘몽상가’라는 별명을 붙여 놀린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을 빌려 당신을 ’19세기 몽상가‘라 소개하시곤, 한 학기 동안 제대로 공부해 보자고 말씀하셨다. 안경 너머로 교수님의 눈빛이 햇살 아래 강물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정말 우리에게 제대로 된 공부를 시키셨다. 사상가들의 정의를 직접 휘어잡아야 한다며 우리에게 영어 원서를 읽게 하시고, 자신의 유니크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며 개발새발 쓴 ‘자신의’ 레포트를 제출하라 하셨다. 또 가을엔 문학의 정수인 시를 한 작품 외워야 한다며 학교 뒷산을 혼자 걸어 보라 권면하시고, 경춘선이 자신을 부르는 날엔 수업에 오지 않아도 용서하겠다는 자애를 베푸셨다. 교수와 학생으로 만난 수업에서 그는 당신을 ‘선배 지식인’, 우리를 ‘젊은 지식인’이라 칭하며 당신이 하는 말씀을 무조건 우러러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교수님께서는  학기가 지나고 우리의 눈이    깊어지길 바라셨다. 그러나 학기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는 나조차도 우리에게 게으른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여전히 얕은 눈의 깊이를 들킬까, 교수님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갈수록 교수님께서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우릴 꾸짖는 일이 많아졌고, 혼내시는 와중에도 그는 항상 우리에게 당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가  우리 눈의 깊이는 어떠했을까. 샘물보다 얄팍했을까? 잠시의 뉘우침으로 조금은 깊어져 있었을까.





그는 진심으로 기대하는 만큼 크게 실망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노교수였다. 그가 처연한 모습을 보인 그날엔 그의 진실한 눈빛에 감격스러워하다, 그만 애잔한 마음이 훨씬 더 커져, 애먼 강의실 천장을 바라보아야 했다. 눈을 감싼 볼록 렌즈가 두터워지다 못해 강의실 천장을 뿌옇게 만들었다.


19세기 몽상가를 만난 작년 한 해에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종강 이후에야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주섬주섬 찾아 읽는 것은 앞으로도 하게 될 후회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런 자기 위로를 할 수 있다. 교수님께서 해주신 여러 조언들을 곱씹고 소화하며 한 해를 보냈다고. 그것이 이제 몸에 새겨진 듯 생생하게 울리는 가운데 차근히 그렇게 살아보고 있다고.





눈을 맞추라고 꾸중하는 이 없이도 내 눈이 꾸준히 깊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맑고 깊은 눈을 가진 그는 그런 수업을 하는 교수였다.

작가의 이전글 혼자 일어설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