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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여유 Jun 22. 2024

시(詩)를 공부하는 마음

내 글의 주인은 나



수업 시간에 첫 발표할 생각을 하니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새벽에 쓴 시를 수강생 수만큼 출력해서 가방에 넣고 강의실로 향했다. 나의 자리는 강의실 뒷문과 가까운 제일 끝 자리이다. 처음 수업을 듣던 날, 쭈뼛거리며 앉았던 빈자리가 고정석이 되었다. 말씀하시는 교수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학처럼 앞으로 빼고 빈틈을 찾아야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그 자리가 왠지 편하다. 



매주 같은 자리에 앉다 보니, 근처에 앉은 분들과 주로 인사를 나눈다. 낯가림하는 나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해 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다. 낯선 공간에서 작은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시는 다정한 분들이다. 오늘도 강의실에 막 도착한 나를 보고 앞자리에 앉은 두 분이 안부를 물으신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이 한마디로 시선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저 오늘 시 써왔어요!" 

"오!!!!! 시 써왔어?? 그럼 저기 칠판 번호 옆에 이름을 쓰라고. 다른 사람이 쓰기 전에 먼저, 얼른!" 


'17. 그림자놀이 - 여유'

후다닥 앞으로 나가서 빈 숫자 옆에 시 제목과 이름을 쓰고 자리로 돌아왔다. 수강생들이 한주 간 습작한 시 가운데 자리 잡은 17번 시가 앞에서 뒤로,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잠시 후 교수님이 오시고 수업이 시작됐다. 시 세 편을 공부한 후, 수강생들은 순서에 따라 습작시를 발표했다. 평소처럼 교수님의 평가가 이어졌다. "스토리라인이 참 좋아. 그런데 시로 압축하는 힘은 약해. 이 부분을 발전시켜 봐."라든지, "일상 이야기를 잘 정리해서 가져왔어"라든지, "무언가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으로 드러나있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교수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서 들었지만, 수강생들의 발표가 계속될수록 손에 자꾸 땀이 났다. 16번 발표가 끝나고, 17번 차례가 왔다. 17번 여유, 내 차례다. '흠-흠-' 떨리는 목소리를 두 번 가다듬고 시를 낭송했다.


 


그림자놀이 


손전등 하나

손가락 열 개로

작은 세계를 만들던 밤


그림자 품은

검둥 강아지 얼굴 위로

작은 새 날개 위로

길쭉한 꽃게 다리 위로

우리 아기 새하얀 웃음이 내려앉았지요


스르르 잠든 아기 머리맡에서 속삭였어요

언젠가 인생의 긴긴밤을 만나거든

제일 반짝이는 별을 따라 걸어가라고

별빛 아래 그림자를 친구 삼아 

너의 세계를 그려가라고




시 낭송이 끝나고 자리에 앉자,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순수하고 맑게 잘 그려냈어. 시 문형도 좋고. 시가 재밌어. 재미있게 잘 만들었어. 앞으로 열심히 써봐. 알았지?"


아마도 첫 시를 쓴 병아리 수강생이라 좋은 말씀만 하셨겠지만, 내내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느즈러졌다. 시작정원(詩作庭園)에 뿌려진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시를 쓰는 일은 처음보다 쉬워지길 기대하며. 



집에 돌아가던 길, 수업 서두에 들은 교수님 말씀이 계속 생각났다. 


"시를 공부한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해. 이 자부심이 나를 버티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내 글은 내가 만드는 거야. 배짱을 가지고 글을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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