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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글 Nov 30. 2022

그 사소한 다정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몽글 017


"청담역 14번 출구 도착했는데, 투썸플레이스 안에 계신가요?"

청담역 14번 출구에서 만나서 바로 앞에 있는 투썸플레이스에 가기로 했지만, 먼저 도착했다던 그가 14번 출구 앞에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청담역 프리존 실내정원으로 오셨어요?"

그에게 답장이 왔다. 그곳은 어디인가..? 


"아니요 14번 출구 앞이에요"

"지하에 미세먼지 프리존 실내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기로 갈게요"


그는 지상이 아닌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에 있다고 하거나 지하에서 만나서 같이 올라가자는 말도 없이, 지하에서 만나 같이 올라가려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연히 출구 앞에서 만난다고 생각했던 내가 잘못된 것일까?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11월 중순의 날씨는 좀처럼 춥지 않았다. 햇볕은 뜨거웠고, 만나기 전부터 텍스트로 느껴지는 무뚝뚝함과 첫 만남을 애매한 일요일 세시 반, 커피 한잔 마시며 시간과 돈을 절약해보겠다는 그 속내가 맘에 들지 않았다. 만나기 전에 서로 주고받은 대화는 몇 개 없었으며, 꼭 공장 돌리듯이 잡은 것 같은 약속이 형식적이고 삭막하게만 느껴졌다. 일요일, 청담역,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카페, 세시 반. 왠지 오늘 커피 소개팅으로 여러 명과 약속을 잡았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약속 장소에 있지 않았던 것, 무뚝뚝하고 어딘가 연애 고자 같은 태도와 말투. 그리고 나타난 그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그냥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미 우리는 마주하고야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것이다.


커피를 주문하는 과정에서도 기분은 상했다. 점원이 사이즈를 물었고, 사이즈를 보여줬는데 잘 보이지 않아서 "제일 작은 거...(주세요)"라고 말하는 내 말을 자르고 "레귤러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마주 보고 대화할 자신이 없어서 걸으며 대화할까 생각 중이었기에, "드시고 가시나요?"라고 물어보는 점원의 질문에, 그에게 "테이크 아웃할..(까요)" 고 물어보는 내 말을 또 자르고서는 "먹고 갈게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커피를 주문하는 사이에도 집에 가고 싶어 죽겠는 기분이었다.


말을 하기 싫으면 도저히 페르소나가 안되어 말이 입에서 안 떨어지는 나는, "화가 났냐" "원래 무표정이 디폴트냐"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냐" "자기에 대해 궁금한 게 없냐" "MBTI 뭐냐"에 이어 나의 혈액형까지 추궁당했고, 살면서 이런 유형은 처음 들어본다는 말까지 들었다. 무표정과 질문에 대답만 하는 내가 상당히 무례하다는 것도 내가 잘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세시 반에 만나 네시까지 겨우 30분을 채웠고, 나는 "나갈까요?"라는 말로 나는 당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씻는 시간은 그렇다 쳐도 집에서 약속 장소까지 이동하는 시간, 커피 마시는 시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총 1시간 반을 쓴 게 너무 아까웠다. 하필 애매한 3시 반에 보자고 해서, 오전 오후 일정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도 너무 아까웠다. 양쪽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무승부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H의 프로필 사진이 바뀐 것을 발견했다.


금요일 나는 H에게 만나자고 제안했다. H는 '나 왜 만나냐'는 나의 말에 '네 생각이 그렇다면, 알겠어'라는 말만 했고(그는 늘 내 의견에 '알겠어'라고만 대답해 사람을 답답하게 했다), 서로 맞춰가며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집으로 돌아가 장문의 메시지로 나에게 끝을 고한 사람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고 생각보다 H는 나에게 중독이었다.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인간중독으로 인해 또 미련을 못 버렸다. 그런 H에게 맞춰줄 테니까 만나자고 제안한 것은 나였다. 금, 토, 일, 월의 수많은 선택할 수 있는 날들이 있었고 나는 주말에 그와 만나고 싶었지만, 그가 나에게 만나자고 한 날은 화요일이었다. 주말엔 대체 누구를 만나기에 나를 화요일에 보자는 거지 싶었는데, 그의 프로필에 두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이 아닌듯한 고즈넉한 호숫가 사진 하나와 밤하늘의 별 사진이었다. 그가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내고 여행을 다녀왔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다시 만나기로 한 그것만 붙잡고 마음에 큰 요동 없이 잘 지내왔는데, 마음이 무너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 사진 두장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H는 내가 보자고 하면 보고 그만 만나자고 하면 그러자고 할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크게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벌써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마음에 안 드는 소개팅남에 이어 내 마음을 무너지게 하는 H의 사진 두장은 화룡점정으로 나의 오늘 하루를 몽땅 빼앗아갔다. 이상한 상실감에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이불속에 파묻혀 잠만 잤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머리도 유난히 잘 되었고, 화장도 잘 되었고, 예쁜 옷도 입고 나왔는데, H가 보고 싶었지만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할 수 없었다. 화요일까지 나는 참아야 하고, 화요일에 만나서도 H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시 만난 다고 해도 우리의 관계는 H의 결정으로 인해 또 쉽게 끊어질 것이니까. 서로 맞춰가면서 관계를 발전해나가고 싶을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다투던 와중에도 내 머리가 다칠까 봐 머리 조심하라고 머리를 받쳐주던 H의 그 사소한 다정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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