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의 일상 이야기
북한에서의 나는 "Why?"라는 질문보다 "Yes!"라는 답변에 익숙했다. 내가 사는 곳이 세금 걱정 없는 사회주의라는 말에 그런가 보다 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그 세상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학교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였다. 축지법을 쓴다는 김일성의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태어나서부터 듣던 말들이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토론 대회보다는 암송대회가 난무하는 곳에서 나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생각하는 방법을 몰랐고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위험한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무심코 "Yes!"라는 대답으로 문제를 피했던 적이 많았다. 그렇게 나는 생각을 피하거나 억누르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궁금해하지 않고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북한을 떠난 지 어느덧 7년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을 술렁이게 한다.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끊임없이 떠 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자유를 찾아, 가족을 찾아 길을 떠났을 때, 다시는 추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북한에서 태어났고 그곳이 나의 뿌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대한민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정착한 몇 년이라는 기간만으로는 나의 삶 전부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북한을 떠날 때 이미 기억하기를 포기했지만, 다시 떠올리고 추억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마음껏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말하고, 좋아하고, 바꾸기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곳이기에 더 그런 것 같다. 먼지가 폴폴 나는 흙바닥에서 돌멩이로 선을 긋고, 두텁게 접힌 종이 딱지를 내려치며 놀던 어린 날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개구쟁이 친구들과 작은 개천에서 물장난하며 동네가 떠나가라 웃고 떠들던 시간도 있었다. 단오와 추석 때마다 온 동네가 모여 앉아 음주와 가무를 즐기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최우등생이 되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하고 밤을 지새우며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부모님이 곁에 계신다는 이유만으로 웃음이 날 때도 있었다.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없는 곳에서 잠깐씩 찾아오는 '신경 쓰이는' 일을 제외하고는 걱정이 없었다.
여전히 죽도록 밉다. 북한을 떠났지만, 아직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화가 나기도 한다. 북한이 나에게 한 거짓말과 가식적인 행동이 용서되지 않는다. 자신을 희생시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던 한 사람이 사실은 자신의 거짓된 신화를 창조하기에 급급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강조하는 곳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않았음에 분노했다. 국방이라는 거룩한 의무를 핑계로 수많은 청년이 10여 년의 청춘을 바쳐서 하는 일이 고작 김씨 일가의 집 경비를 선다는 것에 실소했다.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소원인 북한 사람들과는 달리, 다른 세계에서는 쌀밥에 고깃국이 일상임을 몰랐다. 세상에 부럼 없다는 곳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내일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정상인 줄 알았다. 가족이 세상 전부였던 나에게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빼앗던 그들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김씨 일가가 지정한 '죄'가 난무하는 곳에서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만 죄가 있는 줄 알았다. 그들이 계속하여 절망을 주었지만 '희망이 있겠지'라는 안일한 믿음을 가졌었다.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나의 뿌리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이라는 곳에서도 웃었고 즐겼다고 전하고 싶다. 이제야 얻게 된 자유의 2할만큼은 그렇게 사용하고 싶다. 그런데 어떤 내용을 전할까? 깨끗하던 공기에 관해 설명해야 하나, 맑았던 강물의 푸름에 대해 묘사해야 하나.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관심이 많던 이웃에 대해 자랑이라도 해야 하는가. 배운 것이라고는 김씨 일가의 어린 시절뿐인데 과연 그 배움으로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해야 더럽혀진 그곳의 겉옷을 벗길 수 있을까? 눈 속에서 옷이 닳도록 타던 썰매놀이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나의 정신을 더 고되게 한다. 내가 북한에서 왔노라 당당해지기까지 많이도 움츠렸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그곳에 대한 미움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에 과거로 흘려보내야 함에도 여전히 붙잡고 놓아줄 수 없다. 궁금증을 가지고 치열하게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한다. 눈이 가려져 어둠이 빛인 줄 알았던 그 시간에 대해 말을 해야 후련해질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다 말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미 지나버린 어제보다 오늘과 내일에 대해 더 주목하고 싶다.
이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절절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따스한 온기를 가진 애정은 남아있다. 가끔은 북한에 대해 말하는 내가 어린아이처럼 들떠있는 것을 발견한다. 슬픈 기억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남북 군인들이 대치하는 곳의 먼발치에서 망원경으로 북한을 바라볼 때면 잠깐이라도 그 땅을 밟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몇 초라도 더 길게 눈에 담아 가기 위해 한동안 침묵 속에 응시하기도 한다. 온갖 산해진미의 음식이 있어도 여전히 북한의 인조고기 밥을 잊지 못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어도 북한에서 온 탈북민이라면 오래 알던 사람처럼 친근하고 반갑다. 모든 것이 통제된 신비한 곳에서 나만의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나의 고향을 좋아하고,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북한이 아닌 곳에서는 새터민이며 난민으로 불리는 나는 북한에 죄인이고 범죄자이다. 나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곳이 내가 버린 곳이기도 하다. 버리고 온 것에 미안함을 느끼며, 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곳을 원망한다. 그리고 용서하고 싶다. 용서받고 싶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나를 갉아먹는다. 결핍을 만들고 병이 생기게 한다. 부족함 없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 나아가고 싶다. 스스로가 굳건히 서서 북한 사람들도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바꾸고 싶다.
분단으로 난도질 된 마음들이 회복되었으면 한다. 작은 날개를 퍼덕거려서라도 북한에서의 기억과 남한에서의 삶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 그리고, 이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북한에서 오는 나의 뿌리와 남한에서의 현재의 삶을 품고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언젠가는 분단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한반도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날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하며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