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사이의 일상
북한에서는 경찰의 감시와 통제가 일상이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밤마다 이웃들과 산열매나 귀금속을 등에 지고 중국으로 몰래 넘어가 밀수를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영향 속에서 자랐다. 농사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시작한 어머니는 결국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끝내는 탈북까지 하게 되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북한 경찰은 우리 가족의 감시와 통제를 위해 집에 수시로 들이닥쳤다. 예고 없는 불청객의 지속적인 방문과 함께 나는 불안과 공포에 노출되었다.
한국에 온 후, 우리 가족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착실히 공부하고 일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경험은 한동안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옆집이나 이웃집 문을 누군가 갑자기 쾅쾅 두드리면, 집에 있던 나는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손발이 차가워지며 숨이 가빠왔다. 마치 경찰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어머니의 행방을 묻던 그 순간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노크소리가 내 불안을 건드렸다. 그럴 때면 잊고 있던 공포의 순간들이 다시 떠오른다.
탈북 과정도 일부분은 생생히 기억난다. 할머니를 북한에 두고 여동생과 함께 국경을 넘던 그 밤, 나는 두려움과 미안함, 희망 사이에서 흔들렸다. 더 나은 삶과 자유를 찾아 탈북을 결심했지만, 그 선택의 무게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특히 할머니를 두고 온 죄책감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짓눌렀다. 가끔 할머니가 꿈에 나와 나를 꾸짖을 때면, 미안함에 잠을 설치곤 했다. 못난 손녀라는 부끄러움에 할머니의 일은 타인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북한에서의 경험들로 인해 일상에서도 작은 소음에 크게 반응하거나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사소한 정보라도 누설되면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좋은 기회가 생겨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를 제출할 때도 몇 번을 고민하고 망설이곤 했다. 북한에서의 감시는 끝났다고 머리로 알지만, 문뜩문뜩 드는 떠오르는 기억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다시 만나 안정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어머니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어머니와 다시 이별하게 될까 봐 과도한 애정을 쏟고, 어머니의 안위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했다.
대학교에서 상담 심리를 부전공으로 공부하면서, 나는 내 안에 있는 트라우마를 직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왜 내가 이렇게 예민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담을 공부하고, 글을 쓰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상담 교육이나 특강을 들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 삶을 나누고, 신앙을 가지면서 내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다. 이는 북한 체제가 남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트라우마가 나에게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난 왜 이럴까?", "난 나쁜 손녀야", "할머니를 두고 오다니" 같은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누군가 내 정보를 빼내려는 것 같아 불안했고, 어머니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인지한 후부터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별거 아니야", "북한에서의 19년이 아직 나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야", "아무런 감정도, 기억도 없는 게 이상한 거야", "괜찮아질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건강하고 씩씩한 분이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는 아무도 나를 감시하지 않고, 위험한 일도 없으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나 의심의 마음이 작아지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도 강해졌다. 사람과 체제로 받은 상처가 새로운 곳에서 다른 사람과 체제를 통해 회복되고 있다. 아직 불안이나 걱정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지만, 나는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회복하는 과정 속에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