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벌어서 50대는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고 봉사활동 하면서 살 거야.”
아빠는 아프기 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끝내 가족여행 한번 못 가보고 아빠는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엔 조금 억울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아픈 모습 보여주기 싫다며 1인실을 원했다. 간호사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1인실에 있는 시간보다 처치실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고, 그렇다는 건 다시 말해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병원 생활을 오래 한 아빠가 이 점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아빠는 왜 그렇게 1인실을 고집했을까?
우리 병원에도 1인실이 있다. 간호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1인실 환자를 캐릭터 주의 요망이라고 한다. 하나같이 괴팍하고 이기적이며 퍼스트 클래스 같은 서비스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급이 달라. 1인실로 바꿔줘.” 그렇게 자신은 급이 다르다며 1인실로 보내달라던 한 환자는 퇴원 시 생각보다 많이 나온 입원비에 놀라 내가 원하는 온도로 물이 안 나왔다던 둥, 에어컨 회전이 안 되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병원비 삭감을 요구했고, 또 어떤 환자는 스위트룸에라도 있는 양 물을 떠 오라고 하질 않나, 돈을 줄 테니 간식거리 좀 사 오라지 않나 이상한 서비스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형수 환자는 항생제 주사를 놓고 있는 내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한 마디 한 마디 힘들게 입을 떼며 말했다. “혹시 1인실로 옮길 수 있을까요?” 이형수 환자는 대장암 말기로 입·퇴원을 반복하며 이미 스무 차례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어 더는 병원에서도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였다. 담당 교수 또한 임종을 준비하라며 냉정히 말했다. 보통 병원에선 환자의 편안한 임종을 위해 여명이 하루 이틀 남았을 때 1인실을 권유하기도 해, 나는 병실을 알아봐 이형수 환자를 1인실로 옮겨드렸다. 보호자와 함께 짐을 옮기다 상부 장에 붙어 있던 가족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우리 집 거실 장에 있는 가족사진이 생각났다. 그때 난 13살, 동생은 9살,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엄마 아빠와 집 앞에서 찍은 그 사진이 우리 가족의 마지막 가족사진이다. 문득 이 아이들도 아빠 없는 삶의 고단함을 느낄 생각을 하니, 그로 인해 움츠러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며칠 뒤 환자는 1인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삶을 마감했다. 우는 아이들을 달래어 병실 밖으로 내보내고, 고인의 사후 처치를 하는데, 환자의 생전에 좋아했던 옷이라며 이걸로 갈아입혀 줄 수 있겠냐고 보호자는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또 잠깐 있다 퇴원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이 사람은 죽음을 예상했나 봐요. 다시 갈 수 없다고 생각했나? 아, 1인실에서 저희 집이 보이거든요. 그이가 1인실로 옮겨달라고 한 것 보면 가족들만 있는 곳에서 편하게 가고 싶었나 봐요.”
보호자는 쓴웃음과 함께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있는 이형수 환자의 얼굴을 보았다. 아빠는 내가 10살 즈음부터 투병 생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은 제대로 된 여행 한번 가본 적이 없다. 아빠는 그게 아쉬웠던 걸까? 아니면 1인실을 우리 넷이서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지로 생각했던 걸까? “혹시 1인실로 옮길 수 있을까요?”라며 간절히 묻던 환자의 목소리가 아빠의 목소리처럼 들려 계속해 눈물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