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랑이 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준 적도 없는 사랑인 셈이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주 거리가 먼 손녀에 속했다. 영화나 드라마 속 ‘우리 강아지’라 불리며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지는 밥상이나 배부르다며 손을 내저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간식거리들은 나와 상관없는 완벽한 픽션이었다. 두툼한 솜이불처럼 폭폭한 관계는 영원히 내가 모르는 애틋한 세상이었다. 혹시 그 세상에 살고 싶었느냐 묻는다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일 것이다. 글쎄. 원해보지도, 그려보지도 않은 관계는 애초에 내 삶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왕래조차도 자주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사람 자체가 살가운 편은 아니라고 했다. 엄마와 큰이모는 늘 혀를 내둘렀다. 네 외할머니는 정이 없었어. 우리 엄마지만, 진짜 못됐어. 자매는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며 그때 엄마 참 미웠다고, 엄마는 항상 아들밖에 몰랐다며 어린 시절 서운함을 토로했다. 누구에게 더 모질었는지 과거를 헤집는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듣는 일뿐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 정도를 홀로 살아온 할머니는 몸속에 언제 자라났는지 모를 암 판정을 받으시고 재작년 가을, 우리 가족과 큰이모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됐다. 아픈 엄마를 낡고 좁은 빌라에 한시 한초라도 더 둘 수 없다던 큰이모와 엄마가 제일 먼저 나서서 할머니를 모시기로 한 것이다. 할머니는 큰이모네 집에 사시기로 하셨고,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5분 앞에 할머니가 계셨다. 어쩐지 시간이라는 개념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세어보기도 까마득한 긴 세월이 지나 할머니를 마주했다. 인간에게서 가장 늙지 않는 곳이 목소리라고 한 말은 진정 사실이었다. 기억 속에도 흐릿한 그녀의 얼굴이 목소리만큼은 뚜렷했으니 말이다. 어디 가서 모난 성격이라고 들어본 적 없는 나였지만 몇 년 만에 이루어진 누군가와의 재회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곤 한다. 문 앞에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몇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다. 용기가 필요했다. 10년이라는 세월의 문을 열고 최대한 붙임성 좋게 다가가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저 윤희요 윤희. 많이 컸죠? 몸은 좀 어떠세요.” 지금 내가 몇살인지, 학생인지 직장인인지 아주 빤하고 가벼운 정보조차도 할머니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깊은 추억도 정도 없어서 지금도 여전히 어르신들을 대하는 게 매우 어렵다. 그때의 할머니도 나를 보았을 때 그러셨을까. 하수구가 무섭다며 억지로 뛰어넘으려다 무릎이 모조리 깨진 채로 엉엉 울던 아이가 어느새 키는 당신 딸을 한참이나 넘어서고, 어릴 적 얼굴이 남아있지 않은 채로 제 앞에 섰을 때.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셨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를 대하는 게 어려우셨을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가까이에 계신 만큼 이틀에 한 번은 꼭 들러서 얼굴을 찾아뵀다. 할머니는 늘 작은 방에서 TV를 보셨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안부를 묻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신 날은 혈압을 재드리기도하고, 손끝을 찔러 혈당을 확인해보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당신의 사랑을 받아본 아이처럼, 부어오른 손을 꼭 잡아보기도 했으며 식사는 절대 거르면 안 되고 약은 잊지 말고 챙겨 드시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나는 미뤄두었던 손녀로서의 숙제를 하기 바빴다.
모질고 정이 없었다던 엄마와 큰이모의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할머니는 말이 많으셨다. 내가 태어난 달은 사주가 어떤지, 무엇을 조심해야 좋은지, 우리 엄마가 어릴 적에는 어떤 아이였는지... 할머니의 말은 쉽게 끊길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과거 이야기를 수면 위로 꺼내 올렸다. 미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만히 있곤 했다. 과거를 더듬어보는 할머니의 얼굴이 퍽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아주 마르고, 무척 작았다. 점점 정신이 흐려져 손녀딸도, 하물며 자기 자식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날 나는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스쳐 지나갔지만 '저 또 올게요. 라며 여전히 부어오른 손을 잡고 속삭였다. 며칠을 더 버티지 못하시고 할머니는 떠나셨다. 나는 외할머니가 계신 채로 24년을 살았었지만 6개월 동안 나눈 대화가 가장 길었고, 새로 한 머리가 잘 어울리냐는 질문에 처음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손녀가 되었다.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오열하고 주저앉을 만큼의 정이 생겼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 할머니와 나누던 시시콜콜한 옛날이야기를 되새기고, 방 너머 나를 부르던 할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백반기행을 자주 보던 나의 할머니. 우리 엄마는 정말 착하고 강한 딸이라고 말하던 나의 할머니. 그런 딸의 자식이 되어 그렇게 당신의 손녀가 된 내가, 아주 오랫동안 남아있던 숙제를 마칠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이 글을 보내고 싶다.
늦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작게 덧붙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