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최대한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야 무릎이 앞좌석과 닿지 않을 수 있다. 1시간 남짓한 시간을 위해 선택한 저가 항공사는 눈감아주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옆 사람과 부딪히고, 원치 않은 숨소리가 매우 밀접하게 공유되며 상당히 좁은 간격 때문에 게걸음으로만 좌석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래도 1시간이니까. 좋아하는 드라마 한 편 혹은 너덜너덜해지도록 들어댄 플레이리스트만 있다면 아주 간단한 비행이었다. 단언컨대 이 비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부산으로 향하는 세 번째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러니 나의 비행 유형은 어떤지 이제는 파악이 될 횟수였다.
비행기 멀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닥에 붙어 달리는 것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증상이었다. 그러나 공중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왜 하필 구름 위에서 유난인 건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증상은 대충 이러했다. 발현되는 시각은 대략 착륙 30분 전. 체한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오고 두통이 시작된다. 마치 지독한 숙취처럼 깨질듯한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이 나를 괴롭힌다. 이와 같은 증상은 비행기 탑승 전 커피를 마셨을 때 더 악화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페라떼, 바닐라라떼 등 우유와 카페인이 섞인 아이스 음료는 어김없이 속을 뒤집어 놓았다. 멀미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다.
첫 번째, 커피는 멀리해야 한다. 아메리카노도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며 우유가 들어간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두 번째, 탑승 전 양치를 한다. 입 안이 상쾌하면 두통이나 울렁거림이 잦아드는 효과가 있다. 이는 만성 편두통을 앓으며 깨닫게 된 방법이었다. 멀미에도 꽤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마지막, 물과 민트향 캔디를 들고 탑승한다. 비행기를 타기 전 주의사항을 숙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자놀이를 자극하는 옅은 통증과 명치부터 번져오는 답답함이 불청객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그때를 위한 것이다. 물과 민트를 머금고 눈을 감는다. 이 정도면 비행은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그건 멀미가 아니었던 걸까. 준비하지 못한 당혹스러움보다 ‘준비했음에도’라는 말이 머리칼을 쭈뼛 세운다.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마주한다는 건 아마 평생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음이 분명했다.
세 번째 비행을 하던 나는 앞으로 놓인 날들이 까마득하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누구나 겪듯 곧 졸업을 앞둔 사회 초년생들은 취업과 진로 사이에서 끝날 줄 모르는 고뇌와 자책을 반복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나는 초점을 약간 벗어났다. 돌연 삶의 본질을 향한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수많은 시간이 미칠 만큼 길게 느껴졌다. 감히 셀 수도 없을 날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하며 나는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언제까지 24시간이라는 굴레를 반복해야 하는지, 살고 있다는 건 인간에게 내려진 매우 악랄한 벌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난 죽고 싶다는 말인가? 분명 39C 좌석에서 할 법한 상념은 아니었다. 허무했다. 살아감과 동시에 죽어가는 중이라니. 이딴 무상을 비행기 안에서 하게 될 줄이야.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나를 상상하자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두통과 메슥거림은 순식간에 과호흡으로 이어졌다.심장이 손바닥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손끝까지 저릿해질 만큼 불규칙적으로 두들겨 대는 박동은 잦아들 기미가 없었고 당장이라도 바깥 공기를 쐬지 않으면 비행기 창문을 깨고 뛰쳐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이럴 줄 몰랐다. 입도 대지 않은 커피도, 헛구역질하며 해댄 양치도, 물과 민트향 캔디까지 전부 완벽했다. 허나 필요 없었다. 내게 당장 필요한 건 지상이었다. 그건 공중에서는 무리였다. 고작 인간이 땅과 하늘을 모조리 손에 쥘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남은 방법은 착륙이었다. 두 다리가 땅에 붙어야 했다. 찬 바람이 콧속까지 들어와 뇌를 뚫고 지나가야 했다. 어금니로 민트를 씹어먹었다.
죽음과 비행기와 민트.
39C 좌석에 탑승한 승객은 세가지를 되뇌었다.
죽음과, 비행기와, 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