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양심은 있는가. 사람을 수비드로 찌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중간중간 흐리고 바람도 불어 좀 선선하다. 그래봤자 31도인데 이걸 선선하다 느끼게 되다니 인간의 적응력은 참 소소한데 야무지다.
여름날의 가사는 더워지기 전에 끝내놓으려 하고 있다. 특히 청소기 돌리기. 우리 집 청소기는 딱 하나 단점이 있다. 더운 공기를 들이마시면 배기구에서 엄청난 열바람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 안 그래도 더운데 이 방 저 방 골고루 더 뜨거워지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가사는 아직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숙제 같다. 그래서 눈 뜨자마자 다 해치워 버리고 나머지 시간은 여유롭게 나 하고 싶은 일 하며 보내고 싶은데 이전에는 벽 얇은 집이 훼방을 놓았다. 아랫집 방문 닫는 소리까지 들리는 윗집에서 들려오는 이른 아침 청소기 소리는... 나라도 싫을 것 같아 지난여름엔 아랫집이 집을 비우기까지 2시간 동안은 소리나 진동이 있는 가사를 할 수 없었다. 그냥도 하기 싫은 것을, 하려고 기다리기까지 해야 한다니. 그 지겨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 이웃은 7시 반에 출근하시는 분이라 어찌나 고마운지 모른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오늘은 선선함에 의욕이 배가되어 아침부터 오이지도 만들었다. 다섯 개뿐이라 10분 컷. 작년엔 3,4일 정도 있다가 먹었던 것 같은데 이번 주말에 먹을 수 있으려나. 일본에도 浅漬け라는 겉절이식 조리법이 존재하지만 우리 입맛엔 역시 우리 것인지, 나는 오이지가 훨씬 훨씬 훠얼씬 좋다.
이런 끝이 보이는 기다림,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는 기다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감으로 화한다. 아침에 맞이하는 첫 식사도 그렇다. 엄청나게 맛있는 걸 먹는 건 아니지만 전날 저녁 위장에 셔터 내리고 16시간 기다린 후에 먹는 그 첫 끼니는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식사시간에 제한이 없을 때에는 몰랐던 기다림이 주는 묘미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기다림이 필요하다. 얼린 밥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먹으려면 전자레인지 4분, 달짝지근 다방커피를 마시려 해도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 팔팔 끓여야 하는 시간 1분이 소요된다. 날도 더운데 어째서 더운 예시만 생각나는 걸까. 어쩌면 우리의 매일에는 아주 자잘한 기다림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산다는 건 무수한 기다림 속에서 결과를 내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내가 요즘 가장 핫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자의 기간갱신 심사 결과다. 이방인에게 비자는 목숨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기한이 다가오면 그때그때 갱신을 해줘야 적법하게 그 나라에서 체류할 수 있다. 입국관리청 홈페이지에 심사 기준시간은 1개월 정도라 기재되어 있지만 보통은 2, 3주면 문제없이 받아왔는데 이번엔 두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토요일에는 드디어 비자가 끊긴다.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건 아니지만 삶에 약간의 고달픔이 끼게 생겼다. 이 더운 날에 시청에 가 추가적인 행정수속을 밟아야 하고, 그로 인해 지금 심사 중인 건에 대해서는 전부 아날로그로 대응해야 하며, 최악의 경우 은행계좌가 동결될 가능성도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올해 들어 도쿄 입국관리국 관할의 재류심사가 많이 밀려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어떤 행정서사는 働き方改革 (워라밸 개혁)으로 유급휴가 취득률이 높아져 심사원이 부족하다는 설명을 들었다던데 입국관리국은 자기 직원들이 공무원 주제에 노동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게 업무 지연의 정당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
시끄러운 청소기를 자유롭게 돌릴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나 오이지가 익기를 기다리는 것, 간헐적 단식의 종료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좋든 싫든 내 의지로 하는 기다림이다. 그리 길지 않은 그 끝에는 빛나는 자유와 고향의 맛, 포만감이라는 적절한 포상도 있다. 비자는 내가 저 주세요, 하고 징징거리고 속 타야 할 게 아니라 자기 국민인 일본인이 외국인과의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 일본 정부가 응당 제공해야 할 서비스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내 의지로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니며 기다림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흔들리고 귀찮아져야 한다는 게 참. 문득 공복을 참으며 아침을 기다리는 정도는 참 귀여운 것이었구나 싶다. 짧은 글에 생각이 많아져 쓸데없이 시간만 많이 들였다. 밥이나 먹어야지. 우걱우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