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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Oct 29. 2024

선거소 문 앞까지만 다녀온 일본 중의원 선거

"주말에 뭐 했어요?"

지인이 물었다.


"맨날 지내던 대로지. 집안일하고 선거 가고..."

"어? 언니 선거권 있어요?"

"아니, 타인을 대리로 한 간접투표."

"아, 뭐야."


지난 일요일, 일본은 중의원 선거일이었다. 증세, 엔저로 인한 물가상승, 종교세력과의 결탁, 정치자금 파티의 뒷돈문제 등 여당에 대한 불신이 큰 상태에서 열리는 총선이라 상당히 재미있는 선거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뽑는 것을 재미 삼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제까지 일본에서 맞이하는 선거는 그런 재미있는 이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참정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10월 중순, 집에는 남편 이름 앞으로 한통의 엽서가 도착했다. 투표소 입장권이었다. 이런 게 내 집에 날아오는 것이 처음이라 후보 홍보자료들은 나중에 오나 싶었는데 그런 건 없었다. 선거 일주일 전쯤부터 거리를 빙빙 도는 홍보차에서 하는 소리도 귀 기울여 들어봤는데 무슨 당, 누구누구, 잘 부탁드립니다, 역 앞에서 몇 시에 연설합니다 정도의 이야기 밖에 없었다. 정치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시간, 인터넷을 찾아볼 정도의 IT리터러시가 있어야만 후보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누구 뽑을 거야?"


우리 집 유일한 유권자인 남편은 뽑을 인물이 없다고 했다. 이십 년 가까이 이 선거구는 여당 의원이 꽉 잡고 있지만 딱히 지역 발전에 실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외의 인물들에게 맡기기에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며 비례대표만 자신의 지지당을 선택하고, 선거구 의원은 백지를 내겠다고 한다.


"엑, 투표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야."

"당신들 그 누구에게도 표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유권자의 의사표현이야."


일견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세상은 무효표의 의미를 일일이 헤아려 주지 않는다. 어떤 정치인이 기권표 수를 세어보겠으며, 그걸 굳이 자기반성으로 가져갈까.


"그럴 거면 그 표 나 줘."

표가 아까워진 나 - 선거권이 없는 한국인 -가 말했다.


선거 포스터 게시판 (좌) / 투표소 가는 길에 만난 고양이 (우)

 

선거날이 밝았다. 90년대 후반, 모닝구 무스메란 걸그룹이 '선거날 우리 집은 왠지 모르겠지만 투표 갔다가 외식해'라는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그 가사대로 우리도 선거가 끝나면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려고 조금 먼 거리였지만 투표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여전히 걸어 다니는 사람 없는 휑한 거리에, 날씨까지 찌뿌둥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여기로 오라는 화살표

투표소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건물 체육관에서 한 선거소. 3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우리 앞에도, 뒤에도 사람은 없었다. 다들 오전 중에 투표를 마친 것일까. 건물 안까지 들어가 일본 초등학교 체육관을 구경해 보고 싶었지만 사람도 없는데 접수도 않고 서성이면 수상해 보일것 같아 건물 안으론 들어가지 못했다.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남편만 들어갔는데 선거관리감독들만 즐비하게 앉아있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투표했다고 한다.


"내 것까지 잘 투표했어?"


기권표를 내겠다는 사람을 나는 이렇게 꼬드겼다. "가장 이상적인 선거는 최고를 뽑는 것이지만 그게 아닐 때엔 그 안에서 최선을 고를 수밖에 없어. 최종적으로 가장 많은 표를 가져가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건 변함없잖아." 선거권이 없는 외국인이지만 일본 땅에서 살아가는 이상 내게도 증세는 온다. 일본이 다시금 전쟁을 치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면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그 영향이 미칠 수 있다. 정식 유권자인 당신의 신념과 부딪히지 않는다면, 우리 조금 더 유의미한 의사표현을 해보자. 결과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함께 나라를 바꿔보려는 움직임에 동참해 보자. (라고 투표권도 없으면서 뻔뻔한 요구를 한 것이다.)


"응. 생각해 보니까 무효표 내느니 그게 나은 선택 같아."

"그렇지?"


남편이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그럼 다음 한국 대통령 선거 투표에선 나도 지분 있는 거지?"


나는 반문했다.

"무슨 이상한 소리야? 한국 대통령 뽑는데 일본인 지분이 왜 있어."


"어, 너는 왜 일본 중의원 선거에..."

"어차피 버릴 거였잖아. 이제까지 낸 내 세금 값이라 생각해 주라. 돈만 내고 세금의 행방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뽑는 건 못한다니 억울하잖아. 아! 대신에 나중에 한국 영사관 데려가 줄게. 자, 와인이나 마시러 가자."


이번 선거는 일본인들 내부에서도 장기집권당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2012년 이후 줄곧 정권을 유지해 오던 자민당과 연립정당인 공명당은 목표로 하던 의석 과반수를 채우지 못했다. 소수 여당으로 남든, 정권 교체가 되든, 자민당으로서는 참패쇼크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막 총리가 된 지 한 달째인 이시바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고, 벌써부터 총리 교체설이 솔솔 피어오른다.


이날 지역 투표율은 49.26%. 남편의 것인 척한 나의 표는 사표가 되고 말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위기감을,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 되었기를 바란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태평성대는 천년만년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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