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사는 중장기 체류 외국인들은 자신이 가진 비자 기한을 갱신하고 나면 금융기관에 새 재류카드 사본을 제출해야 한다. 범죄수익의 이동, 돈세탁, 테러자금 공여 방지가 목적으로, 일본국적이 아닌 사람 전부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만약 이를 하지 않으면 일정기간 후 계좌가 동결된다고 한다.
보통은 재류기한의 2~3개월 전쯤이면 은행에서 편지가 날아온다. 비자 갱신 후 은행에 연락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인터넷으로 제출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개중에는 새 재류카드를 들고 직접 영업점에 방문해야 하는 은행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게 내 주거래 은행이다.
그런 시스템은 '귀찮다'는 것 말고는 이제까지 문제가 된 적은 없다. 8282의 민족이라 미리미리 기한 갱신신청을 했고, 내 조바심이 지면에 묻어났는지 심사도 기한 내로 8282 끝났다. 그래서 계좌 동결이니 뭐니,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번엔 입국관리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5월에 신청한 비자가 3개월이 넘도록 가타부타 소식이 없었다. 그 사이 내 원래의 재류기한도 지나버렸다. 재류기한 중에 비자 갱신 신청을 하면 2개월간 특례기간이 주어져 심사가 늦어지더라도 합법적으로 머무를 수는 있지만 무늬는 어째 영 불법체류자 같은 모양새라 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면 괜히 어색한 웃음이 지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다림에 지쳐 이 상황을 즐기게 되어버린 나처럼, 나의 계좌도 한동안은 즐겁게 잘 굴러가고 있었다. 문제가 발각된 것은 9월 초, 남편 계좌의 돈을 내 계좌로 이체하려 하자 보내지지 않았다. 남편 통장 어플에는 '보냈다'라고 되어있는데 내 통장 어플에는 아무런 기재도 없다. 소리소문 없이 증발됐던 돈들은 다음날 오후, 남편 에게 되돌아왔다. 내 의지에 반해 돈줄이 막히는 이런 일, 경제사범이나 경험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드디어 내게도 계좌 동결이!
"저는 집에만 있는 사람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何言ってるの? (뭐라는 거야?)"
"もしものために (혹시 몰라서)"
잠시 헛소리를 하다 문득 자동이체 걸어둔 것들이 걱정되었다. 연체금 붙으면 입국관리국에 소송을 걸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테스트 삼아 남편 통장에 100엔을 보내보았는데 입금 실행 버튼을 누르자마자 쉽게 내 백 엔이 등짝을 긁고 있는 저 자의 주머니로 홀랑 들어갔다. 들어오는 건 없으면서 빠져나가는 거만 충실히 하는 통장이라니. 화수분 기능이 있어 쓰면 쓰는 대로 돈이 팡팡 파라라라 팡팡팡 쏟아져 나온다면 좋으련만, 정직한 내 통장은 쓰면 쓰는 만큼 곧이곧대로 숫자를 기입해 나갔다.
-100
-5730
-2350
철저하게 소비생활에만 포커스가 맞춰진 통장화면은 괜히 사람을 조바심 나게 만든다. 핸드폰 화면에서 은행 어플 아이콘을 보는 것도 싫어졌다.
다행인 것은 그제, 오랜 기다림 끝에 입국관리국으로부터 심사가 끝났다는 메일이 온 것이다. 너무 결과가 안 나와서 난생처음 입국관리국에 전화도 걸었는데 (이틀 동안 전화해 겨우 연결됐다) 입국관리국 직원은 '심사는 거의 끝났는데 키무사마는 27일이 특례기간 마지막날이니 아마 다음 주, 다다음주 중에 메일을 드리게 될 거예요'라고 했다.
내 귀에는 '(이제까지 밀린 다른) 심사는 거의 끝났는데 (네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지만) 키무사마는 27일이 특례기간 마지막날이니 (진짜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게끔 이제부터 서류를 읽기 시작해서) 아마 다음 주, 다다음주 중에 메일을 드리게 될 거예요'라고 들렸다.
어쨌든 다음 주 새 재류카드를 받아오면 가장 먼저 이 빈사상태의 반푼이 통장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외국인이라는 나의 신분 때문에 어떠한 활동에 제약이 생기는 일은, 잊고있던, 내가 이 땅에서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지 출처: 마이크로소프트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