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밖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이어 현관문과 연결된 우편함에 뭔가 끼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멀어지길 잠시 기다렸다가 우편함에 손을 밀어 넣자 작은 갈색 편지봉투가 손 끝에 걸렸다. 보낸 이를 확인하기에 앞서 봉투째로 살짝 흔들어 본다. 사각사각. 커피다. 내가 기른.
한 쇼핑앱의 미니게임에 빠져있다. 토마토, 양파 같은 작물을 기르는 심플한 게임이지만 물과 비료를 얻기 위해 30분에 한 번씩 물이 차는 물양동이를 클릭하거나, 하루에 세 번 갱신되는 광고보기 퀘스트를 깨거나, 친구들의 작물에 인사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해서 나의 하루가 어딘지 모르게 부산스러워졌다. 상품을 사면 포인트처럼 물이 따라오니 품을 들이지 않고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뭐든 돈, 돈, 하는 세상, 여기서까지 뭐든 돈인가 싶어 열심히 몸으로 때우고 있다. 어차피 사야 할 거 여기서 사면 일석이조잖아, 이런 생각도 없는 건 아니지만 현실세계에 대한 작은 반항이랄까. 그냥 꼿꼿해 보고 싶다. 괜히.
이 커피는 거기서 나흘간 기른 것이다. 비록 화면 속 디지털 밭뙈기지만, 나흘동안 약 22000그램의 물을 주고 수확했다. 수확물은 쿠폰으로 받아 대상 상품 중 하나와 교환할 수 있는데 머리가 빨리 마르는 수건이 있어 잠깐 혹했지만 내가 기른 커피를 받기로 했다.
참 잘 생각한 기획이다. 리뷰에는 모두 '수확한 커피가 도착했어요!'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귀엽다. 리뷰를 쓰진 않았지만 나도 쓴다면 그런 말을 쓰게 될 것 같다. 디지털로 기르고 손으로 수확하는 체험은 이제까지 맛보던 보통 게임의 레벨업과는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현실과 비현실이 묘하게 교차되며 화면 안에서 했던 노력들을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그래. 노력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누가 봐도 '와' 할 만한 결실로 이어지지 않는 일도 있다. 하지만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던 자투리 시간들은, 누덕누덕 기워져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하나의 수확물이 되었다. 꼭 엄청난 일을 하며 살진 않아도 그냥 흘려보내기 쉬운 시간에 뭐라도 하는 그냥 이런 삶, 그걸 살아가는 그저 그런 사람인 채로도 괜찮을 것 같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노력이고, 그 열매도 바로 여기, 내 손 위에 있으니까. 실상은 앱 회사에 광고 수익을 주고, 거기 출점한 판매자들에게 이익을 주는 성실한 일벌 롤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런 일벌도 있어야 벌집도 굴러가지.
봉투를 뜯으니 귀여운 동물 그림이 그려진 드립커피가 네 개 나왔다. 맛이 궁금하지만 덕지덕지 의미를 발라놓은 뒤라 홀랑 마셔버리기 좀 그렇네. 날씨가 좋은 날, 마음에 아무런 구름이 끼지 않은 주말 아침에 두 잔을 내려 남편과 나누어 마셔야지 하면서 때가 되길 기다리고 있다. 숙성 과정을 거치면 더 맛있는 커피가 되지 않을까, 그런 바람도 품어본다.